지금 우리나라는 사상적 전환기를 맞이하고 있다. 군부독재정권과 보수우파保守右派의 부정부패에 염증을 느꼈던 국민들은 ‘인권’과 ‘평등’의 기치를 내건 진보좌파進步左派에 대해 매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DJ와 노무현 정부였다. 그런데 지난 10년 동안 그들이 보여준 것은 독선과 무능뿐이었다.

이에 화가 난 국민들은 지난 17대 대선에서 진보좌파를 단죄하고 보수우파를 압도적으로 지지했다.

“100년을 지탱하겠다.”며 사자후獅子吼를 토했던 열린우리당은 채 10년도 못되어 해체되었고, 시대의 양심으로 주목받던 민주노동당도 자기분열의 길을 걷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 대통령은 정말로 시운時運이 좋았던 사람이다. 그는 지금 ‘실용주의’라는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제시하며 국정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명박 대통령이 선택한 ‘실용주의’가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수 있는 히든카드인가.

만약 히든카드가 아니라면, 그가 선택해야 할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무엇인가. 여기서는 세종의 경우를 토대로 그 문제를 좀더 살펴보고자 한다.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실용주의’가 지닌 태생적 한계

누가 뭐라 해도 이명박 대통령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보수우파’다. 그런데도 그는 ‘실용주의’가 자신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두 가지 측면에서 언급할 수 있다.

하나는 불필요한 이념논쟁에서 자유롭고 싶은 내적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기업의 전문 CEO 출신답게 명분보다 실리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신봉하는 자세가 체화體化되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러면 ‘실용주의’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삼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문제점은 무엇인가.
 
‘실용주의’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중국의 작은 거인 덩샤오핑이 제시했던 ‘흑묘백묘黑猫白猫’를 들 수 있다.

그 말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고양이는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것으로서 상술商術에 능한 중국인의 실용적 처세술로도 곧잘 인용된다.

그런데 국가정책을 집행하는데 있어서 ‘흑묘백묘’의 논리를 적용하면,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즉 어떤 국가정책은 큰 정부 론에 입각해서 추진하고 다른 국가정책은 작은 정부 론에 의거해서 미온적으로 대처할 경우, 국가정책은 일관성 결여와 예측불가능의 블랙홀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필자는 ‘실용주의’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되어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분명히 말하건대 덩샤오핑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사회주의였고, 그의 행동철학은 ‘실용주의’였다.

그러나 이명박 대통령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실용주의=행동철학’이라는 인식하에 새로운 정치 실험을 모색하고 있다.

바로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한국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6세기 전의 세종은 과연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 나갔을까?

세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 그 이름은 ‘따뜻한 보수우파’

세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는 한마디로 위민爲民과 애민愛民사상에 기초한 법치주의(덕치주의 포함)였다.

그것을 현대적 용어로 표현하면, 아마도 ‘따뜻한 보수우파’가 가장 적합할 것 같다. ‘따뜻한 보수우파’란, 보수우파의 기본속성(점진적 개혁을 선호하고 법과 제도 중심의 작은 정부론을 지지하며 ‘자유’와 ‘효율’을 핵심가치로 여김)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진보좌파들이 제기한 사회적 약자 보호에 적극 나서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즉 작은 정부론 에 입각한 정부의 재정규모 축소, 정부규제 및 조세부담 완화, 친 기업 환경의 조성을 통한 일자리 창출, 복지예산의 효율적 활용으로 계층 간 빈부격차와 갈등 해소가 ‘따뜻한 보수우파’의 행동철학이다.

또 그들은 FTA나 세계화와 같은 국제적 트렌드에 적극적인 자세로 대응하면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으로 분배 가능한 몫을 키우기 위해서 각고의 노력을 기울인다.

더욱이 그들은 FTA나 세계화로 인해 선의의 피해를 입거나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연민의 정을 느끼며 피해보상 및 지원책 마련에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다.

다만 세종과 현대의 ‘따뜻한 보수우파’간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것은 세종이 예악禮樂을 통한 사회 질서의 확립과 천지간 조화(일명, 국민대통합)를 법치보다 중요시했다는 점이다.

세종이 추구했던 치세治世의 도道는 형틀 위의 법조문이 아니라 저잣거리의 질서와 평화를 일궈내는 인륜人倫이었다. 그에게 있어 법은 예악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마지막으로 땡 처리하는 보조수단에 불과했다.

그러나 현실은 덕치주의로 해결할 수 없는 난제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참고로 ‘예기’를 보면, 예악에 대한 의미와 세종이 추구했던 치도治道의 개념을 음미할 수 있는 구절이 있기에 그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예禮란 천지의 질서이고, 악樂이란 천지의 조화를 의미한다. 선왕이 예악을 제정하심은 입과 배와 귀와 눈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장차 백성들로 하여금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을 고르게 하여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가 바른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기 위함이다. ...<중략>... 치세의 음音이 편안해서 즐거우면 그 정치는 조화를 이룬다. 고로 성聲으로써 음을 알고, 음을 살펴 악을 알고, 악을 살펴 정치를 하게 되면 치도治道가 갖춰지게 된다.』 ◇ 출처 : 이한우 저,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2006, pp.299~300에서 재인용

세종의 정치적 이데올로기였던 법치주의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은 부지기수로 많다. 여기서는 세종 9년(1427년) 8월에 일어났던 유감동兪甘同 사건을 중심으로 그의 법치주의를 언급하고자 한다.

유감동은 검한성(檢漢城; 현, 명예서울시장) 유귀수의 딸로 평강현감 최중기와 결혼했다가 간통(그녀는 무뢰배 김여달에게 성폭행을 당한 후, 그와 오랫동안 밀애를 즐겼던 다소 이해하기 힘든 여자였다) 사실이 발각되어 최 씨 문중에서 쫓겨났던 비극의 여인이다.

그 후, 유감동은 강상의 윤리 대신에 성의 자유를 만끽하기로 작심하고 영의정 출신의 사대부로부터 천민인 공인에 이르기까지 39명의 남자들과 통정을 했다.

그리고 간통죄로 사헌부의 탄핵을 받기에 이르렀다. 일부 대신들은 세종에게 유감동을 능지처참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주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죄질이 고약하더라도 법 집행을 함부로 해서는 곤란하다. 그러니 유감동의 죄는 대명률大明律에 따라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결국 희대의 섹스 스캔들을 일으킨 유감동은 대명률에 따라 장형杖刑을 부여받은 후, 변방의 관비官婢로 내쫓겼다.

이것이 현대판 죄형법정주의가 아니고 무엇인가. 그 후로도 간통사건이 몇 차례 더 발생했다. 그 소식을 접한 세종은 남녀 간의 은밀한 관계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여자들이 좋지 못한 행동을 하는 것은 혼인의 시기를 놓쳤기 때문이다.”, “남녀의 욕구를 어찌 법령만으로 막을 수 있겠는가?”(이한우 저, ‘세종, 조선의 표준을 세우다’ 2006, p.365에서 인용)

우리는 이와 같은 세종의 말을 통해 그가 얼마만큼 백성들을 밑바닥부터 이해하려고 노력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그는 가혹한 법 적용보다 따뜻한 인간애에 기초한 교화敎化로 문란한 사회풍속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던 임금이었다.

세종의 행동철학; ‘실용주의’로 조선의 국정을 이끌다!

세종의 ‘실용주의’는 임금으로서의 통치철학이 아니라 국정의 효율적 운영을 위한 행동철학이었다.

세종은 성리학을 자신의 정치적 문법으로 삼았지만, 국가의 통치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설령 이단의 학문(예: 불교, 도교, 풍수지리, 무속 등)일지라도 그들 분야에 대한 지적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중략>...지신사 안숭선 등이 아뢰기를, “경연은 오로지 성현의 학문을 강론하고 구명하여 정치 실시의 근원을 밝히는 곳이온데, 풍수학이란 것은 그것이 잡된 술수 중에서도 가장 황당하고 난잡한 것이오니, 강론에 참예시킴이 옳지 못하옵니다.”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그러하더라도 그 근원을 캐보아야겠다.”하니 안숭선이...<중략>...』 ◇ 출처 : 세종실록 15년(1433년)/7월/7일

당연히 신하들은 세종의 그런 태도에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그때마다 세종은 유학이라는 학문의 고정된 틀에서 단 한 치도 벗어나지 않으려는 신하들의 편협한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치자治者로서의 유연한 사고를 강력하게 주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공격을 멈추지 않는 신하들에게는 개인적인 혐오감마저 숨기지 않았다.

또한 세종은 경사체용經史體用의 학문방법을 철저하게 신봉했던 독서광이었다. 경사체용이란, 중국의 경학(經學; 사서오경을 지칭)을 철학적 원리(體)로 삼고 ‘자치통감’과 같은 역사서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발췌한 후 활용하는 방법론(用)을 의미한다.

세종은 이러한 경사체용의 학문방법에 입각하여 지식의 실용화를 추구했으며, 그 결과는 훈민정음 창제(‘성리대전’이 훈민정음 창제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함)와 고려사 편찬(‘자치통감’이 고려사 편찬의 밑거름으로 작용했음)으로 이어졌다.

이뿐만이 아니다. 세종은 남에게 과시하는 학문이나 지식 자체를 거부했다. 그는 자신이 즐겨 읽었던 ‘대학연의’라는 책에 나오는 격물치지(格物致知; ‘모든 사물의 이치를 끝까지 파고 들어가서 정확한 이해에 이른다’는 의미)를 생활화했다.
 
그는 백성들의 민생고民生苦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신이 배우고 익힌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적용했고,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열정으로 실사구시를 추구했다.

그의 집권 시절에 편찬된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팔도지리지’는 그의 ‘실용주의’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우리가 가야할 ‘제3의 길’은 무엇인가?

첫째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와 행동철학을 분명하게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부하 직원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자리에 드는 것은 최고지도자의 절대 덕목이 아니다.

최고지도자는 국민의 머슴이 아니라 국민에게 꿈을 파는 상인이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정치적 이데올로기 = 따뜻한 보수우파’, ‘행동철학=실용주의’를 우리가 가야 할 ‘제3의 길’로 채택해야 한다.

세종은 그것을 잘했기 때문에 조선의 제일가는 성군이 될 수 있었다.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더 이상의 정치적 화장化粧은 바람직스럽지 않다.

둘째는 최고지도자는 유연한 사고로 조직을 이끌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지도자가 주위 사람들의 진언을 듣지 않고 똥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조직과 모든 사람들이 불행해질 수밖에 없다.

세종은 유연한 사고로 국정을 운영했을 뿐만 아니라 신하들의 시시콜콜한 얘기까지도 끈기 있게 경청해주었던 임금이었다.

세종의 ‘실용주의’는 그의 유연한 사고와 경청에서 비롯된 것이다. 우리의 최고지도자도 세종처럼 했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우리는 세종에 대해서 열심히 학습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알아서 손해 볼 일은 없으니까.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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