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강도 높은 노동경쟁의 시대가 아니라 변화와 스피드, 그리고 열정과 트러스트가 필요한 전략경쟁의 시대다.

따라서 리더는 사회변화의 속도와 트렌드를 정확하게 가늠하고, 예측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안목과 균형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조직구성원들에게 비전과 동기부여를 제시하고 조직 내부에 적절한 긴장감을 조성할 수 있는 리더의 전략적 사고가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전략적 사고의 의미와 프로세스

  물론 세종 시대에는 ‘전략적 사고’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적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세종은 ‘전략적 사고로 국정을 운영했던 CEO 군주’로 존경받아 마땅하다.

전략적 사고는 전략경영의 전제조건으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업무를 어떤 자세로 어떻게 처리하느냐와 직결되는 개념이다.

또 전략적 사고의 프로세스는 ‘문제인식 ▷ 현실분석 ▷ 대안 도출 ▷ 대안평가 및 선택 ▷ 실행’ 순으로 이어지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문제인식[1]은 무엇이 문제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단계로서 문제발생의 대내외적 요인 및 배경분석이 주류를 이룬다.

현실분석[2]은 현황분석, 전략목표와 제약조건 검토, 쟁점사항에 대한 타당성 검토가 핵심사항이다.

대안 도출[3]은 브레인스토밍brainstorming, 토의, 대내외 전문가 자문 등을 거쳐 실행 가능한 여러 대안들을 모색하는 단계다.

대안평가 및 선택[4]은 도출된 여러 대안들에 대한 내부평가와 진단(예: SWOT 분석)을 거쳐 문제해결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단계다.

실행[5]은 구체적인 추진계획의 수립, 리더의 실행의지 천명, 자원 투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단계다.
 
  파저강 정벌과 세종의 전략적 사고

  세종이 전략적 사고의 달인이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는 매우 많다. 여기서는 세종 15년(1433년)에 일어났던 파저강 정벌(1433.4.19~1433.4.27)을 예로 들어 그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파저강은 오늘날 중국의 랴오닝성遼寧省 환런현桓仁縣에서 발원해서 압록강에 합류하는 동가강을 지칭한다. 또 파저강 정벌은 세종의 위대한 치적治績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4군6진 개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만약 세종의 파저강 정벌이 실패로 끝났다면 여연, 자성, 무창, 우예 지역에 대한 4군 개척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선 파저강 정벌에 대한 논의는 “야인 400여 기병騎兵이 여연 지역을 급습하여 조선 백성을 살상하고, 우마牛馬를 빼앗아 달아났다”는 평안도 감사의 긴급 보고(세종 14년 12월 9일)를 계기로 시작되었다.

세종은 여연 지역을 침범한 여진족의 추장에 대한 신상파악을 명령했다. 또 그 괴수가 이만주李滿住라는 사실에 분노했다. 그동안 조선 조정은 파저강 근처에 살고 있던 이만주 일당이 조선의 울타리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생각에서 생필품을 지원해왔다.

조선의 은혜를 침략과 살상으로 갚은 이만주 일당의 배은망덕은 파저강 정벌에 대한 세종의 개인적 고뇌로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세종의 문제인식[1] 단계다.

  세종 앞에 놓인 현실은 그렇게 녹녹하지 않았다. 이만주 일당을 정벌하기 위해서는 파저강 지역에 대한 군사작전이 불가피했다. 그때 발생할 수 있는 최대 문제는 명나라와의 외교적 마찰이었다.

이 난제를 풀기 위해 세종은 어전회의를 개최했다. 그리고 “파저강 정벌 여부와, 만약 정벌에 나설 경우 명나라 황제에게 사전보고를 하는 게 옳은 지 여부를 논의해서 아뢰라”고 하문下問했다.

신하들의 의견은 “파저강 정벌은 이만주 일당의 외침에 대한 방어권 차원의 군사작전이기 때문에 명나라에 보고할 필요가 없다(영의정 황희의 주장)”, “정벌계획을 명나라에 알리고 그들의 지원을 받아내는 게 좋다(좌의정 맹사성, 우의정 권진의 주장)”, “정벌 자체를 중지하고 외교채널을 통해 조용하게 해결하는 게 상책이다(이조판서 허조, 최윤덕의 주장)”는 주장으로 첨예하게 엇갈렸다.

  이 자리에서 세종은 맹사성과 권진의 주장을 지지했다. 그리고 홍사석洪師錫을 여연 지역에 파견하여 사건의 진상을 철저하게 조사한 다음,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그 후 세종의 지성사대至誠事大에 감동한 명나라 황제는 ‘파저강 정벌은 조선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공문서를 보내왔고 홍사석의 보고서도 세종에게 당도했다.

명나라의 공문서와 홍사석의 보고서를 정밀 검토한 세종은 ‘조선의 외환外患은 북방에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며 파저강 정벌을 단행하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문제는 일부 신하들의 반대였다. 이것은 세종의 현실분석[2] 단계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세종은 파저강 정벌과 관련된 제1차 어전회의를 끝낸 지, 약 한 달 후인 1433년 1월 11일에 제2차 어전회의를 개최했다.

이때 세종은 파저강 정벌에 대한 반대론자들을 설득하는데 주력했다. 아무리 좋은 정책이라도 신하들의 적극적인 지지와 동참이 없는 한, 그 정책은 실패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세종이 내세운 논리는 간단명료했다.

“이만주 일당의 야만을 방치할 경우, 그들의 조선 침략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그들을 제압하고 북방개척에 적극 나서자”라는 것이었다.

  또 이날 회의에서 세종은 파저강 정벌의 반대론자였던 최윤덕을 신임 평안도 도절제사에 임명했다. 그로부터 며칠 후, 최윤덕은 “지금은 땅이 얼고 물이 흘러넘치니 4, 5월 봄에 물이 마르기를 기다려서 행군하는 것이 가하옵니다”라는 말로 기존의 반대 입장을 철회하고 세종의 뜻에 따를 것을 천명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경이 말한 바를 내가 어찌 듣지 않겠는가. 군사의 진퇴에 관한 한, 모두 경의 처분에 따르겠다”는 말로 최윤덕의 입장 변화에 화답했다.

다만, 이조판서 허조의 반대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천하의 원칙주의자 허조도 1433년 2월 15일에 열린 제3차 어전회의에서는 세종의 뜻을 수용하게 된다. 이로써 파저강 정벌이라는 대안이 도출[3]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최적의 작전개시 날짜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1433년 2월 28일, 세종은 이미 여진족의 거주지역에 정탐요원으로 파견했던 박호문의 첩보내용을 토대로 의정부, 6조, 삼군 도진무 등 고위대신들과 작전개시 날짜를 놓고 비밀회의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서 여러 가지 대안이 나왔지만, 세종은 파저강 정벌의 최고 군사책임자인 최윤덕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었다. 즉 “풀이 무성한 4, 5월 봄에 정벌하자”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이로써 대안평가와 최적 선택이[4]이 결정된 셈이다. 

  1433년 3월 7일, 평안도 도절제사 최윤덕은 자신의 부하 최치운을 세종에게 보내 작전계획의 완료를 보고하고, 공격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1만 명의 군사를 증원해달라는 요청을 했다.

세종은 최윤덕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1433년 3월 19일, 세종은 파저강 정벌을 종묘와 사직에 고한 후, 최윤덕에게 최종적인 작전명령을 하달하고 대소신료들과 함께 충청도 온양으로 온천행차를 떠났다.

신하들은 이구동성으로 “파저강 정벌을 앞둔 시점에서 임금이 한양을 비우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청했다. 그러나 세종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세종 나름대로의 계책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대규모 정벌을 앞두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동시에 조선에서 암약暗躍하고 있을 여진족 첩자들에게 “임금의 온천행차를 보니, 정벌 얘기는 뭔가 잘못된 첩보 같다”라는 역정보를 흘리기 위함이었다. 그런 점에서도 세종은 탁월한 군사 전략가였다.

  한편, 세종의 최종 작전명령은 1433년 3월 27일에서야 최윤덕에게 전해졌다. 그는 약 20여 일 동안 파저강 일대의 적정敵情을 살피다가 1433년 4월 19일 새벽에 일곱 개의 공격루트를 통해 전격적인 기습작전을 감행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파저강 일대는 최윤덕이 이끄는 조선 군대에 의해 평정되었고, 이만주 일당의 침략의지는 완전히 꺾여 버리고 말았다.

1433년 5월 16일, 세종은 한양으로 돌아온 최윤덕에게 우의정을 제수하면서 그의 공적을 치하했다. 마침내 실행[5]단계가 성공적으로 종료되었다.
 
  세종으로부터 배워야 할 전략경영의 4가지 지혜

  우리가 세종으로부터 배워야 할 전략경영의 지혜는 크게 4가지다. 첫째는 명확한 비전을 설정해서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인재들을 하나의 목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이만주 일당의 야만적 침략에 직면한 세종은 ‘강소국(强小國; 작지만 강한 나라)의 건설’이라는 비전을 제시함으로써 임금과 신하, 그리고 조선 백성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다.

“어느 한 사람이 꿈을 꾸면 그것은 그저 개꿈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함께 꿈을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돔 헬더 카미라의 얘기도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 같다. 세종의 전략적 사고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는 묘약이었다.

  둘째는 적극적 인물을 내세워 세종 자신이 추진하고자 하는 역사적 대업을 맡겼다는 사실이다.

한껏 기세가 달아오른 집단이나 조직이라 할지라도 선두에서 앞장서는 향도자嚮導者가 없다면, 다중의 힘을 한곳으로 결집시키기 어렵다. 왜냐하면 추진력을 구비한 리더가 “Follow Me!”를 외칠 때, 비로소 조직의 강력한 힘이 분출되기 때문이다.

세종은 용맹하고 충직한 최윤덕을 파저강 정벌의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해서 그에게 전권을 부여했다. 그리고 최윤덕은 완벽한 승리로 세종의 믿음에 보답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손자병법’의 모공謀攻편에 나오는 ‘將能而君不御者勝(‘장군의 능력이 뛰어나고 군주가 군대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 승리한다.’는 의미)‘의 논리가 여전히 유효함을 재확인할 수 있다.

  셋째는 모든 지식과 정보를 총동원하고, 열린 마음으로 반대자들의 진언을 끝까지 수용해서 최적의 전략대안을 선택한 후, 실행에 옮겼던 세종의 열린 리더십을 본받아야 한다.

세종은 파저강 정벌에 앞서 홍사석과 박호문을 이만주 일당의 거주지역에 파견해서 그들의 동태와 지형지물을 철저하게 정탐했다.

그리고 이조판서 허조가 잇따라 제기한 문제점들을 점검하고 보완함으로써 작전계획에 내재된 불량률을 최소화시켰다. 파저강 정벌의 완벽한 성공은 그와 같은 세종의 치밀한 전략적 사고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넷째는 선택과 집중의 논리를 전장戰場에 활용했던 세종의 전략적 마인드을 배워야 한다. ‘손자병법’을 보면, ‘격류지계激流之計’라는 게 나온다.

이는 ‘군대의 형태는 물과 같아야 한다. 물은 격류가 될 때 엄청난 위력을 발휘해서 거대한 바위까지 굴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종은 최윤덕에게 약 15,000여명에 이르는 대병력을 주었고, 그들이 파죽지세로 파저강 지역을 향해 총공세를 감행해서 대승리를 엮어냈다.

꼭 필요한 시점에, 조직의 잠재 가능한 모든 역량을 한 곳에 집중시켜 난제를 돌파하는 세종 특유의 지혜가 그를 낭중지추囊中之錐의 군주로 만든 핵심요인이었다. 

김덕수 교수는 충북 오송에서 태어나 충북대 경제학과, 고려대 대학원 경제학과 석박사과정을 이수하고 경제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고려대 강사, KAIST, KIST에서 연구 활동을 하다가 1996년에 공주대 교수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공주대 교수회장 겸 사범대학 일반사회교육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책 집필, 정부기관 및 기업체 특강, 방송 출연 등으로 바쁜 생활을 보내고 있다. 특히 그가 집필한 책 ‘김덕수 교수의 통쾌한 경제학’은 베스트셀러로 선정되었으며, ‘맨주먹의 CEO 이순신에게 배워라’ 역시 독자들의 열띤 호응을 얻었던 명저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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