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밖이어서 설마 하였고, 상식 밖이어서 오히려 측은하였다.

본디 우리 민족은 개결(介潔)한 성품이 있어 악은 용서하여도 몰염치는 보아주지 않는데, 이준원 (전)시장은 무슨 미련이 그리 많았을까? 아직은 아닌데.

허물은 잊히기는 하여도 쉬 씻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잊힌다는 것은 구원의 길이기도 한 것인데 이준원 (전)시장은 무엇이 그리 급하였을까?

이준원 (전)시장이 공주문화재단 대표가 되는 순간 그는 뻔뻔한 사람이 되었고. 그를 임명한 최원철 시장은 단순 무도한 사람이 되었으며, 교육문화도시 공주의 이미지는 땅에 닿았다.

그리고 아무 잘못 없는 공주시민은 창졸간에 암흑의 시대에 사는 우매한 백성이 되어버렸다.

왜 아니겠는가? 어찌 성범죄자에 이름이 오른 사람이 다른 기관도 아닌 문화재단 대표가 될 수 있는가?

도대체 최원철 시장은 누구를 보고 시정을 펼치는가? 공주시민을 조금이라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차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이준원 대표의 행정 경험과 업무장악력을 높이 샀다면 이는 두 사람 모두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심각할 정도로 부족하다는 반증이다.

문화는 행정 기술로 접근하고 풀어갈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럴 것 같으면 문화체육과 공무원들이 맡아서 하면 될 일이지 왜 굳이 재단을 따로 두는가? 세금 낭비하지 말고 차라리 없애는 것만 못하다.

그렇다고 하여 꼭 관련 단체 예술인이 맡아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글을 잘 쓰는 것과 유능한 출판인이 되는 것은 다르듯이 예기와 문화행정은 다르다. 자칫 문예 소비에 치중하다 보면 문화 전반이 경박해지기 쉽다.

문화는 인간이 각기 다른 사연을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받고, 때로 고통받고, 때로 기쁨을 느끼며 살아온 흔적이자 궤적이다.

길가 나무 한 그루 산모퉁이 바위 하나에도 누군가의 추억이 서려 있고 애환이 깃들어 있다. 지나온 길 무엇 하나 함부로 대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러한바 문화재단 대표는 인간에 대한 깊은 애정과 사물에 대한 경외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심미안을 가진 사람이면 좋겠다.

길가에 아름드리 플라타나스가 터널을 이루며 늘어서 있고 길 아래로는 천년 세월을 지나온 천이 흐르고 사람들은 물소리를 들으며 나무 그늘을 따라 걸었다. 그 길을 걷는 사람들 모두 행복해 보였고 사랑에 빠진 사람들 같았다.

공주에 그런 길이 있었다. 교대 앞길이었다. 내 유년과 청춘 시절 매일 걷던 길이었다. 그러나 그 길은 어느 날 엔진 톱 소리와 함께 영영 사라졌다. 그리고 우리가 얻은 것은 채 30초도 안 되는 시간 단축이었다.

이준원 시장 때의 일이다. 그러한 길이 있고 없고에 따라 한 도시의 격이 달라진다. 공주와 같은 고도는 더욱 그러하다.

이준원 대표의 심상은 문화라는 말과는 멀어도 너무 멀다. 설령 10에 아홉이 대표 자격이 부합한다고 하여도 그 험한 허물 하나로도 안 된다.

허물은 세월이 벗겨주고 시민이 호응하는 것이지 최원철 시장이 벗겨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함에도 다른 방안을 강구하지 않는다면 공주시민은 시장의 이름을 ‘최준원’이라 부를지도 모른다.

몹시 상한 자존감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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