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공주 원도심의 상설영화관 공주극장, 호서극장, 중앙극장 외

이복남 수원대 명예교수
이복남 수원대 명예교수

공주 본정(현 중동) 147번지 옛 금강관 터에 건립된 '공주극장'과 ‘욱정’이라 불리던 반죽동 5-16번지(봉산길 5)에 옛 모습 그대로 서 있는 현재의 '공주극장'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기존 본정의 공주극장이 반죽동으로 이전했다는 기록은 발견할 수 없다.

일제의 한국어 매체 금지로 인해 1940년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강제 폐간되는 등 전시체제기 극심한 혼란 상황의 와중에서 1939년 이후 이 지역 극장에 대한 보도 자료는 아쉽게도 찾아보기 어렵다.

광주, 대전 등지의 초창기 국내 영화상영관과 유사한 외관을 갖춘 반죽동 소재 '공주극장'의 건축물대장에는 건축허가일이 1943년 6월 7일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이 건축물의 유래는 추후 보다 면밀한 자료조사를 거쳐 밝혀져야 할 것이다.

반죽동 공주극장은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다. 1960~70년대 중반까지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이 극장을 경영한 극장주는 김안순(1925~2004?)이었다.

공주극장 맞은편에 거주했던 김안순이 붉은 천 댕기로 장식한 비녀를 꽂은 단아한 모습으로 수시로 살림집과 극장을 오가며 동거하던 지배인과 함께 극장을 경영하던 모습은 당시 공주극장에서 만나는 일상적인 풍경 중의 하나였다.

공주읍공관과 호서극장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공주극장은 한국영화사의 전성기를 수놓았던 수많은 작품들을 상영했다.

이와 함께 50년대 후반, <근화유치원 어린이예술제>, 60년대, 임춘앵이 이끄는 여성국극단의 공연과 다양한 극장 쇼를 무대에 올렸으며. 그때마다 여러 명이 함께 앉는 벤치 의자로 된 객석은 입추의 여지 없이 가득 찼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당대 최고의 스타 김지미, 최무룡이 공주극장 쇼 공연을 하던 어느 날, 이들의 실물을 보려는 인파로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통행 불능 상태를 빚기도 했다.

공주극장은 소유주가 바뀔 때마다 극장명이 '아카데미극장', '계룡문화회관'으로 변경되었으며 때로는 극장 운영이 중단되기도 했다.

아카데미극장은 공주극장과는 달리 재개봉관이었다. 이후 계룡문화회관은 계룡문화회가 1996~98년 기간에 연극전용극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물을 임대한 후 변경한 명칭이다.

공주극장의 객석을 그대로 유지했던 계룡문화회관의 객석 수는 380석으로, 2층에 영사기 등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公州邑公館開館(공주읍공관개관).’ 1959년 11월, 읍공관 개관을 보도한 동아일보 4면 머리기사 제목이다. 당시 동아일보는

(공주)읍민의 전당 공주읍공관은 드디어 문을 열었다. 동공관은 지난 5(오)월에 준공되었으나 공주읍공관으로 건축 도중에 興行場(흥행장)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중간에 당초계획을 변경하여 공주문화원(公州文化院)과 계약 아래 흥행장으로 문교부당국에 허가를 얻으려고 하였으나, 인근 3미터 내에 중동국민학교가 있기 때문에 문교부 당국의 허가를 얻지 못하고 약 6개월간이나 개방을 보지 못한 채 시비가 벌어져 왔던 것이나, 결국에는 ‘문화관’이라는 명칭으로 아동교육에 지장 없는 영화에 한하여 상연키로 조건부로 허가를 얻어 개관되었다고 한다고 보도했다.

1954년 12월, 임대한 건물에서 출범해 1966년 6월에서야 신축 원사를 마련한 공주문화원은 공주읍공관을 1959~62년 12월까지 위탁 운영하며 주요 행사를 이 장소에서 개최한다.

이 기간 동안 공주읍공관에서 거행된 문화원 행사 중 1959년의 <공주문화원 개원 5주년 기념행사>는 60년대를 바라보는 이 지역 공연물의 특성과 흐름을 파악할 수 있어 특기할 만하다.

이 행사의 일환으로 12월 16일 오후 2시, <고전무용예술제>, 오후 7시에는 〈대음악제), 17일에는 3막 5장의 오페라 <봉황수 (鳳凰愁)>가 공주읍공관 무대에 올려졌다.

시설 결함과 흥행 부진으로 경영난을 겪었던 공주읍공관은 1963년 2월, 호서화물자동차주식회사에 매각된다.

당시 이 지역의 대표적인 화물운수업체였던 호서화물자동차주식회사는 이 '읍공관'을 화물 적재 창고 용도로 사용하기 위해 인수했다고 한다.

그러나 호서화물자동차주식회사의 주주인 김인환(金仁煥, 1918~1992), 이상철(李相喆, 1917~2002), 명창겸(明昶簾, 1921~1980)은 원래의 용도를 변경해 영화관을 세우고 ‘호서극장(湖西劇場)’으로 명명한다.

호서극장은 1966년 신축 공사를 진행한 후 1967년 7월 개관했다. 이후 1972년 3월, 김인환과 이상철이 명창겸 소유의 호서극장 지분을, 1974년 8월에는 공주극장 극장주 김안순이 아들 양태완 명의로 김인환 지분을 인수해 2021년 9월까지 보유했으며 현재 소유주는 공주시이다.

TV보급과 원도심 유동 인구 감소 등으로 원도심 영화관이 사양길로 접어들면서 1995년 이후 호서극장은 휴관 상태에 놓이게 된다. 당시 어떤 사업자가 이 건물을 임대하기도 했으나 미처 개업을 하지 못한 채 간판만 달아 놓고 잠적한 바도 있다.

이후 현재까지 호서극장은 예전 그대로의 외형을 유지한 채 여전히 원래의 자리에서 이 건물 한편에 자리 잡은 작은 꽃집과 함께 공주 호시절을 떠오르게 하는 원도심 풍경으로 남아 있다.

한편 1972년, 중앙극장이 공주 원도심 상설영화관 중 가장 늦게, 가장 큰 규모로 개관했다.호서극장 극장주 김인환과 이상철은 청년기에 동업으로 정미업을 했던 장소인 풍곡정미소 부지(산성동 120-1번지)에 중앙극장을 세우고 그간 축적한 극장 경험을 다시 이 극장에 쏟아 넣었다.

실상 60년대 후반이후 개관한 호서, 중앙극장은 공주에서 나고 자란 위의 두 극장주의 우정과 신뢰가 밑받침이 되었기에 극장 이외의 상업시설로 업종이 변경되지 않고 존속할 수 있었다. 두 공주 사람의 평생에 걸친 동행의 궤적이라고 할 수 있다.

1989년 9월, 고령으로 동업을 정리할 시기에 접어든 위의 두 극장주는 중앙극장을 삼성생명에 매각한다. 이후 김인환은 현 축협 인근인 산성동 135-7번지에 100석 정도의 작은 규모의 영화관을 중앙극장이라고 명명해 신축, 개관한다. 이 극장은 대전의 한 영화사가 임대해 직영으로 경영했으며 2005년 3월 8일 폐관되었다.

70년대부터 이들 원도심 영화상영관은 이 지역을 대표하는 행사가 열릴 때마다 없어서는 안 될 문화예술 시설로 기능했다. 이 지역의 유서 깊은 축제인 백제문화제 기간에 <백제연극의 밤>이나 <백제연극제>, <학생예술제>가 400석 규모의 호서극장에서, <전통음악의 밤〉,〈공주교향악단대연주회>, <곰나루음악제>가 600석 이상의 규모인 중앙극장에서 개최됐다.

무엇보다 연극전용극장이 없고, 극 예술에 대한 관심이 다른 예술 장르에 비해 상대적으로 저조했던 시절, 지역의 뜻 있는 젊은 연극인들의 극예술 연구 모임인 극단 <함성>은 호서극장 무대가 없었더라면 주요 공연이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것이다.

1987년 10월, 공주문예회관이 무령왕릉 맞은편에 건립되었다. 이후 기존 원도심 극장들이 수행하기 어려웠던 대형 콘서트 등의 공연과 집회 공간으로 자리 잡는다.

위에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와 같이 공주지역 상설영화관은 인근 도시보다 이른 시기인 한국영화사의 초창기에 등장했으며, 오랜 기간 원래의 장소를 지켜왔다.

해방 이전 시기에는 금강관과 본정 공주극장, 1950~90년대 중후반까지 공주극장, 호서극장, 중앙극장은 공주 원도심을 대표하는 여가 공간이자 문화예술 시설로서 주로 활동사진과 무성영화, 흑백과 컬러영화 상영과 극장 쇼 공연과 같은 엔터테인먼트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이들 극장은 다목적 공간으로 기능했다. 공주문예회관 개관 전까지 이렇다 할 대규모 실내 집회 공간을 찾기가 수월치 않았던 시절에 여러 정당, 사회단체의 집회, 선거유세, 자선의 밤 행사 등이 빈번히 원도심 극장에서 열렸다.

상설영화관 이외에도 공주지역에는 곡마단이나 서커스 공연을 펼치는 옥외의 가설극장도 있어서 때로는 여기서 공주 예기(藝妓) 삼십여 명이 <명창대회>를 열거나, 〈만주동포구제음악회>와 같은 자선공연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학교 강당 등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하기도 했다.

원도심 극장만이 그려내는 풍경은 지난 시대에 대한 향수를 자아낸다. 특유의 입담과 우스꽝스러운 몸짓으로 시가지를 누비던 샌드위치맨의 추억, 행인의 눈길을 잡아끄는 극장 간판….

유화물감에 비해 페인트로 인물을 살리는 작업은 몇 배의 기술과 정성이 필요한 힘든 작업이라고 한다.

이를 마다하지 않고 대형 간판에 배우의 얼굴과 표정을 페인트로 살려내는 작업을 하던 ‘간판쟁이’ 또는 ‘미술부장’이라 불리던 노련한 극장 화가들….

암기 일변도의 학교 교육이 주종이던 시절, 학생들은 단체 영화 관람을 통해 외부 세계를 향한 호기심과 열망을 다소나마 달랠 수 있었다.

단체로 영화를 관람하기 위해 교복 입은 학생들이 길게 줄지어 입장하던 모습, 영화를 관람한 후 극장 앞에서 찍었던 단체 사진 한 장은 모두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은 그리운 그 순간으로 여전히 마음 한편에 간직돼 있다.

이렇게 원도심 극장은 영상매체 교육 기관 역할을 톡톡히 수행하면서 계층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이 지역주민들과 삶의 애환을 함께 나누었다.

현재 공주 강북지역에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한 곳 있으나, 강남 원도심 지역에는 상설영화관이 하나도 없는 실정이다.

충남지역에는 1940~80년대에 세워진 극장 건축물이 도심 공간 원위치에 원래의 건물 외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남아있는 곳이 거의 없다.

대다수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공주 강남지역에는 단관극장들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그대로 남아있어 그 희소성이 크다.

유서 깊은 공주 원도심 극장과 같은 주민의 기억이 다층적으로 쌓인 공간을 재발견하여 지역의 문화자원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방식의 접근법이 이 시점에서 절실히 요청된다.

이를 통해 원도심 도시 장소성의 붕괴와 해체가 가속화되는 현상을 지연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과 관광객들에게 멀티플렉스 체인 배급망에서 배제된 예술영화, 독립영화, 다큐멘터리 등의 다양한 영화를 즐길 수 있는 기회와 장소를 선사할 수 있을 것이다.

(『웅진문화』제30집(2017년)에 수록된 필자의 ‘공주 원도심 극장의 변천: 상설영화관을 중심으로’를 정리, 게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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