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뉴스는 창간 16주년을 맞아 역사문화의 도시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기 위해 공주원도심에 현존해 있는 구 공주(아카데미)극장 살리기 운동을 펼칩니다. /편집자 주.

 
이복남 수원대 명예교수
이복남 수원대 명예교수

오늘날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떠오른 영상산업을 대표하는 시설인 영화관은 전 세계 어느 도시에서나 대다수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체인 형태로 운용된다. 멀티플렉스가 보편화되기 이전 시기에 국내의 대표적인 여가시설이자 문화시설은 한 개의 스크린을 갖춘 단관극장이었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극장은 원도심 내부의 도시 공간을 활성화하는 중요한 요소로 간주된다. 도시의 규모와는 상관없이 대개 원도심 중심부에 위치해 있는 단관극장은 도시문화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억 요소 중 핵심적인 공간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내 대도시 도심에 위치한 단관극장은 흔히 경제 논리에 의해 극장 이외의 상업시설로 전용되는 등 대부분 그 용도가 변경되거나 사라졌다.

지방 중소도시에서는 이러한 현상이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도시의 주요 기능이 원도심 외부로 이동하면서 유동 인구가 급격히 감소함에 따라 원도심 내부의 시설 유지를 위한 투자도 감소해 원도심의 노후화 현상이 가속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지방 중소도시의 단관극장과 같은 주민에게 익숙한 공간은 해체되고 원도심은 가일층 활력을 잃게 되었다.

개인과 집단이 공유한 기억들이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해 원도심 고유의 장소성의 상실로 이어지는 이러한 현상은 이제 지방도시 도처에서 목격되며, 공주지역 또한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공주 원도심에 대한 기억의 중심부에 이 지역 극장이 자리 잡고 있다. 공주를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은 이 고장의 대표적인 기억의 장소로 원도심 극장을 떠올린다.

공주 원도심 중심부에 위치한 세 개의 단관극장인 옛 공주극장, 호서극장, 중앙극장은 일상 속 문화예술의 향유와 생활문화의 진흥이란 과제가 국가의 정책으로 부상하기 이전 시기부터 이 지역 공동체의 대표적인 여가 및 문화시설로 기능했다.

이 중 중앙극장은 흔적도 없이 시대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여전히 옛 공주극장, 호서극장이 이 지역 주민이 기억하는 외형 그대로, 원래의 자리에 수십 년간 방치되어 있다.

비록 폐관된 상태이지만, 한국영화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옛 극장들이 원래의 자리에 본모습 그대로 존속한다는 사실은 공주 이외의 인근 도시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사례이다.

이 글에서는 공주지역 최초의 극장인 금강관의 등장으로 본격화된 원도심 상설영화관의 변천 과정을 주로 당시의 신문 보도와 극장 경영에 관련했던 인물들에 대한 인터뷰를 통해 간략히 살펴보고자 한다.

공주 원도심 극장의 변천

공주 최초의 극장 금강관-활동사진과 무성영화의 근거지

공주지역 최초의 극장은 언제, 어느 장소에 세워져 언제까지 존속했으며, 어떤 형태의 공연장으로 기능했는가? 공주지역 최초의 극장은 공주 부호 김갑순(金甲淳, 1872-1961)이 세운 금강관(錦江館)으로 확인된다.

금강관이 세워진 연도와 관련해서 1900년이라는 자료'도 있으나 1913년 11월 16일자 『매일신보』는 「공주군의 새 연극장」 제하의 기사에서 금강관의 건립 사실을 보도한 바가 있다. 금강관은 김갑순이 소유한 본정(本町, 현 중동)의 사설시장 내에 위치했다.

1936년에 발생한 본정 대화재를 보도한 한 신문 기사에 따르면 금강관은 옛 명구의원(중동 147번지)자리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살펴보면 조선에 처음으로 영화가 전래한 시기가 언제인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황성신문에 '동문(동대문)내 전기회사 기계창'을 통해 설행(設行)한다는 기사가 실린 1903년 이후부터이다.

당시의 신문 기사를 살펴보면 해외 풍물을 찍은 단편 사진을 약 한 시간 정도 상영한 후 관객이 선호하는 창이나 무용, 연주를 곁들여 공연하는 형태였다.

또한 상영은 주로 저녁에만 이루어졌으며, 공간은 상등석과 중등석으로 구분되었고, 아동 할인이 있었다. 비정규적 형태의 흥행이주를 이루었던 시기였다.

1910년대 초반에는 정규적인 상설관이 생겨나 1910년 2월에는 일본인 관객을 주 대상으로 하는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했고, 1912년 11월에는 대정관, 1913년 1월에는 황금관이 문을 열었다. 한편 1912년 12월에 조선인만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본격적인 영화상설관인 우미관이 설립되었다. 이후 일반 연희장으로 흥행하던 단성사가 1918년, 활동사진 상설관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이렇게 볼 때 공주에 금강관이 등장한 시기인 1913년은 경성에서 본격적인 영화상설관이 생겨나던 활동사진 상영 초창기에 해당한다.

1915년에 <세계문예대활동사진상영단>일행이 공주 금강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는 신문 보도가 시사하듯 활동사진의 새로운 흐름은 경성과 시차 없이 공주로 흘러들었던 것 같다.

당시 공주 금강관의 흥행 형태와 사정 또한 경성 상설영화관과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금강관은 활동사진 상영 뿐만이 아니라 강연회, 금융조합, 권농조합의 정기총회, 졸업식 등 다양한 행사와 집회가 열리는 다목적 장소로 기능했다.

극장 규모는 아인슈타인이 1905년 발표한 '상대성이론'에 대한 〈相對性原理講演>와 같은 강연회에서 보듯 '삼백여 명의 일본조선인 청중'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으로 추정된다.

공주 부호 김갑순의 영화사업과 공주극장으로 개명한 금강관

금강관 극장주 김갑순은 1906년과 1910년, 두 차례 공주 군수를 지낸 후 1910년 10월 한일합병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퇴한다.

이후 그가 운수업, 극장 경영 등 당시 새롭게 부상하는 업종에 활발하게 투자하는 한편 헐값에 대규모 토지를 매입해 막대한 부를 일구었음은 널리 회자되는 전설적인 이야기이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김갑순은 공주 금강관을 건립한 이후 1926년, 논산극장을 세운다. '인구 이천 여에 달하는 군청소재지 논산에 극장과 목욕간' 이 없어서, '논산지방을 발전시키기 위해’ 극장을 삼천오백원에, 목욕간은 일천오백원을 들여 신축한다.

그리고 1931년 12월에는 '대전신극장(大田新劇場)‘을 신흥도시인 대전 대흥정 대전도립병원 앞에 부지 이백여평, 공비 이만오천수백원을 들여 벽동 이층으로 건립했다.

대전신극장 건립 이전에도 대전 춘일정(春日町) 이정목에 김갑순이 소유한 '김갑순극장'이 있었다는 당시 신문보도도 발견된다. 아마도 창(唱)이나 극(劇) 위주의 공연을 선보이는 공간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된다.

1931년 1월 공주 상설시장에 큰 화재가 발생해 금강관이 전소됐다. 이에 김갑순은 1932년 1월, 6천원의 거액을 들여 극장을 신축하고 극장명을 ’공주극장‘으로 개명한다.

당시 동아일보는

충남 공주(公州(공주)주민의 유일한 오락기관인 금강관(錦江)이 금춘에 화재로 전소 되었든바 공주읍 부호 김갑순(金甲淳(김갑순) 씨가 육천원의 거액으로 작년 구월 중순에 기공하야 공사를 진행 중 만 사개월만인 금월 중순에 그 공사를 마치고 불원간 낙성식을 거행하리라는데 명칭은 공주극장(公州劇場)이라한다고 보도했다.

위의 공주극장은 언제까지 존속했을까? 공주극장은 화마가 휩쓴 지 5년 째 되는 1936년 3월 25일, 다시 한 번 인근에서 불길이 옮겨붙어 반쯤 타버리게 된다.

1936년 3월 26일자 『조선중앙일보」는 “지난 25일 오후 한 시경 공주읍 금정 147번지 서순용(徐淳用)의 집”에서 불이나 “이웃에 있는 극장 금강관(錦江馆)까지 반소를 시키고”라고 이 화재를 보도한다.

이에 대해 「동아일보』는 "공주 본정 구시장통(公州 本町 舊市場通(공주본정구시장통)서상용(徐相龍(서상용)의 집에서는 지난 二十四(이십사)일 오후一(일) 시경”에 불이 나서 “맹렬이 부는 바람에 전 시가를 소진할 듯이 불길이 높아 그 집을 전소하고 그 근처 공주극장 일부까지 불이 붙었다고 보도했다. 조선중앙일보가 쓴 금정 147번지'와 '금강관'은 '본정 147번지'와 '공주극장'의 오기로 보여진다.

1936년 5월 말, 화재 이후 불과 두 달여 만에 <오케연주회>가 열린다는 예고가 수 차례 보도되었으며 이후 이 연주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는 동아일보의 사후 보도로 미루어 짐작해보면 화재로 소실된 건물은 빠르게 복구되었던 듯하다.

1932년 6월 17일에는 충청남도 도청을 공주에서 대전으로 이전하는 「조선총독부령」 제48호가 정식 공포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충청남도 도청 이전을 계획대로 추진하면서 1년 이상 공주지역에 도청 이전에 따른 후속 조치를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1932년 7월 10일, 공주읍사무소 마당에서 개최된 공주시민회에서 거론된 보상 요구 사항 중 5번에는 “김갑순씨 개인 경영의 공주 시장을 읍경영으로 하야 연수익 천원을 도모하라” 라는 항목이 나타나 있다. 이 시기에 도청 이전을 선두에서 지지하고 그 부지를 기증했던 김갑순이니 만큼 도청이전에 대한 공주 사람들의 비난의 화살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1938년, 공주금융조합 정기총회가 공주극장에서 열린다는 기사에서 보듯 이렇다 할 행사장이 부족했던 공주지역에서 공주극장은 일제 말기까지, 오랜 동안 각급 기관·사회단체가 가장 선호한 집회 장소였음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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