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몇 년 전 요양병원에서 일 년 넘게 조리원으로 근무했다. 덕분에 노인들의 다양한 삶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 경험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그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배움 카드를 발급받아 요양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나의 첫 근무지는 내가 사는 가교리 마을, 우울증을 앓고 계신 00이 할아버지 댁이었다.

당시 가교리는 장기 요양을 받는 대상자가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요양사의 활동이 생면부지의 일이었다.

센터를 통해 00이 할아버지 댁으로 출근이 정해지면서 시어머님과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

남편은 “두 분의 불같은 성격을 견뎌낼 수 없을 것”이라며 강하게 말렸다. 어찌 알았던지 이웃에 사는 아주머니도 대놓고 말렸다.

사실 나도 마음이 그리 편한 건 아니었다. 할머니의 극성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던 나는 정작 대상자인 할아버지보다 할머니를 감당해낼 수 있을지 그게 걱정이었다. 그래서 출근 일주일 전부터 내내 밤잠을 설쳤다.

젊었을 때 마을 이장을 보신 할아버지는 풍물놀이도 잘하셨고 사람들과도 잘 어울렸을 만큼 흥이 많은 분이셨다.

그런 분이 어느 날 농사일을 하던 중에 갑자기 허리를 다치셨고, 그 후로 점점 마을 고샅길에서만 띄엄띄엄 모습을 보이다가 언제부턴가는 아예 두문불출하고 방에서만 생활하신다는 거였다.

마을 반장인 남편의 심부름으로 서류를 갖다주러 방문했을 때였다. 그때 나는 현관문을 열자마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현관 입구에서부터 발 디딜 틈이라곤 없이 늘어놓은 살림살이, 허옇게 곰팡이 핀 음식들…도무지 사람 사는 집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숨을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발레라도 하듯 요리조리 발가락을 움직여 겨우 들어가 할아버지께 서류를 전해드렸다.

이런저런 상념이 머릿속을 헤집었다. 과연 내가 감당해낼 수 있을지 망설여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 아닌가?

그랬다. 부딪혀보지도 않고 포기부터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 댁 둘째 딸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지 않은가? 그래서 용기를 내어보기로 하였다.

드디어 첫 출근 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할아버지는“요양사라고? 필요 없어! 이런 육시랄!”하시며 욕설을 내뱉는 할아버지를 멀거니 보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할머니도 “나도 늙었어! 몰라요? 더는 당신을 돌봐줄 수가 없다고요!”라며 고함으로 맞받았다. 나의 첫 출근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본의 아니게 노부부 싸움만 붙이고 돌아온 꼴이었다.

요양을 결정한 건 그 둘째 딸이었다. 품팔이하는 한편으로 남편까지 돌보고 있는 노쇠한 어머니가 딸과 통화할 때마다“네 아버지 돌보기가 힘들어 죽겠다. 요양사 좀 쓰게 해 다우.”라고 하셨단다.

첫날부터 성과 없이 되돌아온 나는 다음날엔 아예 종량제 봉투를 챙겨 출근했다. 마침 할머니는 밭으로 일을 나가시고 할아버지만 거실에 누워계셨다.

“나가! 아, 안 나가?”나를 힐끔 보신 할아버지가 대뜸 고함부터 질렀다. 순간 움찔하였으나, 마음을 다잡고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를 만들어 조곤조곤 요양사의 일에 대해 말씀드렸다. 덧붙여 “연세 드신 할머니를 위하는 방법은 할아버지께서 할머니의 짐이 되지 않는 데에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자 할어버지는 “나이 80에 품팔이 다니는 할멈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라며 눈시울을 붉히며 울먹거리셨다.

면접에 성공한 나는 할아버지께 율무 한 잔을 타드리고 거실 청소를 시작했다. 가져간 종량제 봉투가 금방금방 가득 찼다.

일주일 내내 거실과 집안 쓰레기를 치우고, 냉장고 청소도 했다. 집안이 하루가 다르게 말끔해지자 가장 좋아하시는 분은 할머니였고, 할아버지께서도 요양사가 드나드는 것을 조금은 받아들이는 눈치였다.

웬만큼 집안이 치워진 어느 날. 나는 할아버지 점심을 챙기면서 슬쩍 목욕 이야기를 끄집어냈으나, 단번에 거절당했다.

사실 할머니가 가장 원하는 요양 부분은 할아버지의 목욕이었는데, 처음부터 너무 큰 욕심을 낸 거 같아 이 부분은 시간을 두고 접근하기로 작정하였다.

다음엔 “머리와 수염을 깎아 드리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이 역시 좀처럼 허용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끈질기게 설득하여 성공했다. 할아버지가 본인 스스로 옷을 벗고 목욕하기까지는 장장 육 개월의 시간이 필요했다.

요양사의 방문이 익숙해지자 거기에 따른 부작용도 생겼다. 할머니는 새벽이건, 늦은 밤이건 내일 해야 할 일이 생각났다 하면 오늘 전화를 하셨다.

그것도 전화를 걸면 받을 때까지 전화기를 놓지 않으셔서 이만저만 속상한 게 아니었다. 또 김치 담글 일이 생겼거나, 밭작물을 수확했을 때면 내 근무시간이 아닌데도 무조건“김치를 담가 달라 그러고 택배 심부름을 해달라”고 졸랐다.

지난여름 어느 일요일, 그날도 할머니는 허겁지겁 우리 집으로 와서 생떼를 썼다.“우리 애들이 휴가를 온대. 이불 좀 빨아줘야겠어.”

“오늘은 쉬는 날인 거 아시잖아요? 내일 출근해서 해드릴게요.”“내일 비가 온단다. 오늘 해야 해!” 막무가내였다. 이젠 시도 때도 없이 마치 자기 몸종처럼 부리려 들어서 아연실색이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부담을 책임진 둘째 딸한테 전화하였고, 요양사가 해줄 수 있는 일과 해줄 수 없는 일을 조목조목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둘째 딸은 “알았다”며 연신 죄송하다고 했다. 하지만 그 후 할머니는“이제부턴 내가 다 할 거야. 출근할 필요 없어!”

아마도 둘째 딸이 얘기를 전했던 모양이다. 할머니의 찬바람은 한동안 계속되었지만, 그래도 나는 묵묵히 근무하였다. 할머니가 스스로 마음을 풀기까진 마음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할머니와의 관계가 완화될 무렵 할아버지한테 전화가 왔다. 불을 켜서 핸드폰을 보니 밤 11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우리 집사람 가방이 없어졌어.”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고 있는 것이,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였다. “그 안에 일한 품삯하고 통장이 있는데, 혹시 못 봤는가?”나를 의심하시는 것 같았다.

“내일 출근해서 찾아보겠습니다.”그렇게 약속하고서 뒷날 출근했더니 가방을 찾았다고 하시는 거였다.

한쪽 눈을 녹내장으로 실명하신 할머니가 급하게 일하러 가느라 이불 속에 넣어둔 걸 깜박했었다고 한다.

치매의 특성은 대부분 물건을 잃어버리는 일로 시작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나는 그다지 상처가 되진 않는다고. 가방 찾느라 부산떠는 수고를 덜어 퍽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요양사 직무교육을 통해 노인들의 치매 특성과 행동에 대한 대처 방법을 학습한 것이 실전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요양을 받는 보호자들에 대한 교육도 필요하다. 요양사가 모든 걸 다해준다는 터무니없는 오해나, 요양사를 가정부 정도로 여기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00이 할머니만 해도 그렇다. 요양사가 살림을 다 해줄 것이라 착각한 나머지 요양 일에 벗어나는 요구를 스스럼없이 하신 거였다.

가교리 사람들의 노파심에도 불구하고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00이 할아버지의 요양이 어느덧 3년이 되어 간다. 사람들은 할아버지의 말끔해진 외모와 깨끗해진 집안을 보고 본인 일처럼 좋아한다.

이제는 할아버지 댁에 발길을 끊었던 마실꾼도 오가고, 덩달아 할아버지도 성격이 많이 밝아지셨다.

도통 대문 밖을 나오지 않던 할아버지였는데, 날씨가 따뜻한 날은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평상에 나가 잠깐씩 앉아계시다 들어오시곤 한다. 그런 모습을 보고 도회지에 사는 자녀들도 “걱정을 덜었다”며 고마워하였다.

젊은 날 치열하게 살아왔지만, 노쇠해지면서 경제력을 잃어 가족한테까지 외면당한 시골 노년을 주변에서 자주 보아왔던 나는 남의 일 같지 않아서 안타깝다.

하지만‘사회장기요양보험’으로 돌봄 서비스를 통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00이 할아버지만 보아도 그렇다. 이러한 돌봄 서비스가 없었더라면 정말 불우했을 것이다. 막막히 추억만을 반추하고 있을 수밖에 없는 그들과‘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장기 요양 보험이 외로운 노년의 삶에 우산이 되어주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같이 걸어줄 누군가가 있다는 것, 그것처럼 따스한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 일에 동참하여 더불어 가고 있는 나 역시 요양사 일에 보람을 느낀다.

나는 오늘도 깨끗이 세탁한 빨래를 널고 있다. 고달파 내던지고 싶던 마음도 따스한 햇볕에 말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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