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58년 5월 깊은 산속 하늘만 빤히 보이는 강원도 산골에서 보리타작해 놓은 위에서 아침에 태어났다.

보리 위에서 태어나서인지 식복은 많았나 보다. 살면서 그리 배를 곯지는 않았다. 어려서 유난히 할머니를 좋아했던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다.

우리 가족은 춘천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고, 첫 직장을 시작한 곳도 서울이었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 따라 휴가 때 놀러 온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 나의 평생 보금자리가 되어 살고 있다.

친구와 함께 처음 화월리에 오던 생각이 스쳐 간다. 어찌나 길이 험하던지 버스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 머리가 버스 천장에 닿을 듯 덜컹거렸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중심을 잡으며 팔과 다리에 얼마나 힘을 주었던지 버스에서 내리는 데 힘이 쭉 빠졌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달리던 버스에서 내려 한참을 걷고, 다리도 건너서 고갯마루에 서서 본 마을 풍경은 천당이 있다면 이런 곳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무도 평화롭고 천사들만 사는 곳처럼 느껴져 신이 났다.

나는 스물 한 살 어린 나이에 하늘만 훤한 곳으로 시집을 왔다. 태어난 곳, 시집을 온 곳 모두 산으로 병풍을 빙 둘러 놓은 듯한 곳이었다.

시집을 와서는 시아버님, 시어머님, 시누이, 시동생 등 여덟 식구의 밥을 하고, 빨래를 해야 하는 말 그대로 ‘시집살이’가 시작됐다. 아버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데, 나는 그걸 잘 알아듣지 못해 어리바리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가마솥에 밥을 하긴 해야 하는데, 불을 한 번도 때 본 적이 없어서 눈물, 콧물이 범벅이 되어 가며 밥을 지었다.

그때에는 간식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 봄에는 감자, 여름에는 옥수수, 가을과 겨울에는 고구마였다. 고구마를 제일 많이 캤을 때는 팔십 가마니나 됐다. 그 고구마는 온 식구들의 겨울 간식이었으며, 동네에서 마실 오시는 어머님 아버님 친구분들께 동치미와 함께 대접해 드렸다. 또한 큰 소쿠리에 가득 찐빵을 만들어 놓고 먹기도 했다.

그리고 간간이 땅콩을 부수어 넣고 호떡을 만들었는데 “사서 먹는 것보다도 더 맛있다”는 소리를 들을 때는 힘든 줄도 몰랐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냐?”고 묻는다면,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것이다. 힘든 그 시절로 절대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때는 빨래도 냇가의 빨래터로 나가서 해야 했다. 여름에는 그나마 할만한데, 겨울에는 큰 대야에 뜨거운 물을 넣고 빨래를 넣어서 가져가야 하는데, 얼마나 무거웠는지 모른다.

절구통 위에다 대야를 올려놓고 간신히 머리에 이고 빨래터에 갈 수는 있는데, 내리는 것이 문제였다.

운 좋게 지나가는 사람이라도 만나면 도움을 받아 대야를 내려놓을 수 있지만, 혼자서는 빨래 대야를 내려놓을 수가 없어서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버님께서 보시고는 “두 번에 나누어 가면 될 것을 미련하게 한 번에 가느냐?”며 호통을 치셨다.

새벽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학교 가는 시동생들 밥을 해서 먹이고, 도시락을 싸주었다. 그런데 도시락 반찬 할 재료가 없다 보니 무생채가 단골이었다. 무생채를 얼마나 많이 해 주었으면 큰 시동생 친구가 “너의 형수님이 무생채는 잘하셨지.”라고 했단다.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얼마나 미안했던지.

지금이라면 도시락 반찬을 골고루 맛있게 해 줄 수 있었을 테지만, 안타깝게도 그때는 시부모님 밑에 있어서 나의 주권은 전혀 없었다.

그 어렵던 시절을 보냈지만 시집온 것에 대해서 후회는 안 한다. 자상하지는 않으셨지만, 속정이 많으셨던 아버님이셨고, 세상에 한 분뿐이신 마음이 천사이신 어머님이셨다.

지금도 어머님 생각을 하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흐른다. 무어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도 큰 사랑을 주고 가신 어머님이라서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땡숙이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믿어 주고, 적극적으로 후원해주는 영원한 나의 남편이 있고, ‘엄마는 든든해서 좋다’는 나의 분신 아들과 딸, 그리고 또 한 명의 보물 손녀딸이 있다.

때로는 친구 같고,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나의 비타민 가족이 함께해서 당당하게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어 늘 행복하고 감사하는 오늘이다. 우리 가족 앞으로도 쭈욱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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