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구중회 [공주대학교 명예교수, 만권당(카페) 주인]

구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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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선무는 ‘백제의 춤’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장르이다. 원래 이 춤은 중앙아시아에 위치한 나라[강국과 안국]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나라[581~619] 양제[재위 604~618]가 여러 부기部伎로 정비하면서, 문득 ‘백제 호선무’로 깜짝 등장시킨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얼마나 백제 호선무가 유명했기에 국제 무대까지 초대한 것일까? 본래부터 ‘백제의 춤’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호선무는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출발하여 동아시아까지 널리 보급되었던 것 같다. 시대적으로도 8세기까지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양수[1007~1072]와 송기[998~1061] 《신당서》[1060년] <서역전>에 의하면, 서역들[강국, 미국米國, 구밀국]은 개원 연간[713~741]의 초에 호선무의 여자를 보냈다는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령임금 무덤[525년]에서 왕비와 관련된 장신구 중 ‘어린이용 팔찌’와 팔찌가 4쌍이 출토되었고 남자 물건[성기] 모양의 귀걸이도 출토되었다. 보석인 영락도 같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유물들은 모두 호선무의 춤꾼들이 사용하는 장신구들이다.

우선 영락 춤의 중국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으므로 이를 소개하기로 한다.

 이 그림은 4세기[돈황석굴의 이른 단계] 구자Kucha 석굴인 극자이克孜爾 38굴[주실 동벽]에서 뽑아온 것이다. 왼쪽의 춤꾼이 영락을 서로 연결한 끈을 잡고 춤을 추는 모습이다. 그리고 그 옆은 보경[거울]을 들고 있다. 사진기처럼 보경을 들고 춤을 바라보는 모습이 흥미롭다.
 
  [호선무의 특징과 악기 그리고 소품]

  호선무의 특징은 직경 약70cm의 둥근 원 속에서 춤을 춘다는 것이다. 다만 두 발목이 동시에 이 원을 벗어나지 않고 한 발은 항상 원 안에 있어야 한다고 것이다.  

악기는 다음과 같은 3종류가 있다.

1) 가로 부는 피리[횡적]

 

 

 

2) 기본 북正鼓과 화답 북和鼓

<기본 북>

 

 

 

 

 

<화답 북 1, 2>

 

 

 

 

3) 자바라銅鈸

 

 

 

 

 

 

 

악기를 연주하는 사람과 춤을 추는 사람의 의복은 악사와 춤꾼이 달랐다. 악사는 검은색 견포 두건에 비단 옷깃의 붉은 견포 도포를 입었다. 춤꾼은 2명인데 상의가 붉은 가죽이고 옷깃과 소매는 비단이며, 하의가 녹색곤의, 신이 적색 가죽, 바지주머니가 흰색이었다.

[호선무는 천상과 지상 두 종류]

천상의 호선무는 초당[618~707]에 형성된 제220굴 벽면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동방약사東方藥師 경변經變과 서방정토西方淨土 경변이 그것이다. .

우선 동방약사 경변은 다음과 같다.

좌우 양 옆으로 악사樂師 28명이 있고 중앙에 춤꾼舞伎 4명이 있다. [돈황 변상도 가운데 이 그림만이 4명으로 구성되고 나머지는 모두 혼자 추는 춤이거나 2 사람이 추는 춤이다.]

소품으로 춤꾼의 머리는 잡화화관雜寶花冠을 쓰고 머리카락이 흩날리고 손에는 일장一丈[어른 키 길이] 정도의 긴 천長巾을 쥐었다.

몸의 상체는 아래[팔목 천釧] 팔찌와 위[팔뚝 탁鐲] 팔찌를 찼고 몸에는 영락으로 장식하여 목걸이를 걸었고 허리장식도 있다.

무대에는 지름이 70cm 정도인 무늬가 있는 원이 바탕에 깔려 있다.

하체는 치마는 발이 있는 꼬리 부분이 레이스가 달리기도 하였다.

이 그림에서 4 사람은 모두 뒷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우측의 2 무녀 가운데 왼쪽 무녀는 왼쪽을 향해 뒤로 회전하는 자세를 취하여 왼쪽 뺨이 보이고, 오른쪽 무녀는 오른쪽을 향해 뒤로 회전하는 자세를 취하여 오른쪽 뺨이 보인다. 왼쪽 무녀는 좌측을 향해 뒤로 돌고 오른쪽 무녀는 우측을 향해 뒤로 돌며 서로를 마주하고 선무旋舞을 한다. 좌측의 우람하고 힘찬 2 무기는 한쪽 다리로 서서 마찬가지로 마주 보고 선무를 한다.

무녀의 긴 천은 둥글게 나부끼고 머리끈은 높이 휘날리며, 영락은 가로로 날리고 변발辮[변:땋다]髮은 어깨 위로 흐트러졌다. 회전 동작은 마치 질풍, 번개와도 같다.

그리고 서방정토 경변西方淨土經變도 이와 유사한 춤의 동작을 보인다.

그런데 중국 학자 팽송彭松은 굴 벽면 전체의 호선무를 하나의 그림으로 보아야 완성이 된다고 주장한다.

북쪽 벽면의 동변약사경변은 왼쪽 춤꾼 한 쌍이 ‘회전하기 시작[初轉]하는 자세’이고 오른쪽 춤꾼이 ‘반쯤 회전[轉半]한’ 자세를 그렸다는 것이다. 동작의 완성도를 고려할 때 정면으로 ‘되돌아선[轉回]’ 위치에는 다른 한 조의 춤꾼들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할 때 회전의 전 과정이 완성된다.

결국 이들 석굴에 등장하는 이들 3개조 춤꾼들은 비록 의상이 서로 다르고 각각 독립적이지만 회전하는 자세에 있어서 ‘동작’의 연속성이 보인다. 이들을 종합적으로 볼 때, ‘호선무’ 회전의 전 과정과 회전의 서로 다른 동태를 보여준다는 것이다.

이들 동변약사 경변과 서방정토 경변의 조합을 맞출 때, 팽송의 주장처럼 호선무의 온전한 전체의 모습이 완성되는 것이리라.

그렇다면 왜 동방약사 경변과 서방정토 경변을 배치했을까 생각해본다. 경변經變이란 경의 그림이란 뜻이다. 그러므로 동방약사 경변의 동방의 약사경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고 서방정토 경변은 서방정토경을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약사불Bhaṣiajyaguru은 질병 치료의 12대원을 가진 부처이다. 이 굴의 벽화를 시주한 사람은 아마도 병으로 고생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굴의 벽화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재정과 시간이 소요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시행한 것은 질병 치료에 대한 지극한 염원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란 이야기가 된다. 그러므로 호선무 즉 ‘돌아가는 빠른 춤’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픈 데 느릿느릿한 춤을 춘다면 얼마나 초조할 것인가. 사특한 귀신의 활동을 빠른 춤으로 물리치고 싶었지 않나 생각된다. 우리 역사의 벽사춤인 처용무가 바로 연상된다. 조선시대 5방 처용무가 벽사의 방위에 주력한 것이라면 호선무는 속도速度에 주력한 것이라 생각된다. 우리나라 민속신앙의 경책문화에서 사특한 사귀를 쫓기 위해 ‘급급여율령急急如律令’[급하고 급한 율령과 같다는 뜻]하면서 호령을 내리는 것과 같은 믿음이라 할 것이다.

질병이 완치된 이후에 서방의 아미타불阿彌陀佛의 정토로 즉 극락極樂에 가야 할 것이 아닌가 어려운 상상의 세계가 아니다. 220굴의 동방약사불의 서방정토불의 구성과 호선무를 결합한 것은 그야말로 감동적인 한 편의 영화라고 해도 좋으리라.

지상의 호선무는 백거이白居易[772~846]의 <호선녀>라는 시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호선녀여, 호선녀여! 마음은 현을 따르고 손은 북을 따르는구나....[줄임]......노래가 끝나 천자께 재배하고 물러나니 천자께서 그를 위해 살짝 웃음 짓네. 호선녀여. 강거 땅에서 나와 헛되이 동쪽으로 만리 넘게 왔구나. 중원에도 원래 호선을 추는 이가 있었으니 기묘함과 능력을 다툰다 하여도 그대는 미치지 못하리. 天寶[742~756] 말년에 세상 욕구가 변화하여 신하가 첩이고 사람들마다 이 춤을 배웠다네. 궁 안에는 양귀비[719~756]요, 궁 밖에는 안록산安祿山[?~757]이라. 두 사람이 호선무를 가장 춘다고들 했지.

중국의 놀이와 오락 기악에 속하는 부기部伎 문화는 당나라 성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궁중에서 시작된 것이 관가로, 군영으로, 가정으로 널리 확장되어 민간까지 유표된 것이다. 이들을 ‘궁기宮伎’, ‘관기官伎’, ‘영기營伎’, ‘가기家伎’ 등으로 분류하는 것으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백거이는 ‘궁기’가 추는 호선무를 보았으리라. 천자께 재배再拜[우리나라에서 죽은 사람에게 재배하는 것은 고려 후기로 유가의 의례이다]했다는 대목에서 궁중에서 호선무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호선무를 추는 춤꾼들이 중국인이 아니고 강국 등 서역에서 바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었음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 있다.

220굴에서 그림[경변]으로 만난 호선무가 천상의 것이라면 백거이가 만난 호선무는 지상의 것이라고 할 것이다.

[백제 호선무의 문화 콘텐츠]

돈황 220굴의 경변 기악 그림과 관련된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조우관 즉 새의 깃털을 양 쪽에 단 모자를 쓴 사람이 있는데, 이는 한국[백제, 고구려 등]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여튼 한국 사람이 돈황에 갔고 공양을 올렸다는 것은 확인된 셈이다.

수나라 양제 때 9부악과 관련하여 백제 춤꿈이 호선무를 추었다는 문헌기록도 이를 그대로 증명했다.

또 하나 무령임금 무덤에 왕비의 팔찌와 발찌가 몇 쌍이 출토된 바 있다. 그런데 호선무의 춤꾼들의 팔과 다리에는 예외 없이 장신구를 사용하고 있다. 영락도 빠짐이 없는데 무령임금와 왕관식에는 280여 개의 영락이 붙어 있다. 영락이란 보통 끈으로 꿰어 장식한 보석 즉 옥, 구슬 금속 등을 말한다.

호선무를 출 때 이들 장신구들은 빠른 춤사위에 박자 역할을 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들과 한 몸이 되어 움직일 때 완전한 춤이 될 것이다. 무령임금의 왕비의 발찌와 팔찌, 영락도 이러한 역할을 할 것으로 상상된다. 그러한 상상만이 이들 장식구에 대한 활용도를 이해할 것이다.

다음은 무령임금무덤의 팔찌[왼쪽]와 발찌[오른쪽]이다

다음은 호선무 춤꿈의 팔찌[위쪽]와 발찌[아래쪽]이다.

이러한 상상도를 소설가인 조동길 교수께 의뢰하였더니, 멋진 작품을 하나 보내주셨다. 그 시놉시스는 길어서 여기서는 줄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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