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 성묘 길을 막아서듯 늦겨울 비가 내린다. 6주년 기일(忌日)을 맞아 어머니 영정 앞에 생전에 즐겨 드시던 음식을 차려 정성껏 제사를 모셨는데도 가슴이 먹먹하고, 코끝이 찡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비가 온다, 코로나 바이러스 핑계로 칩거를 하고 있으니, 어머니가 떠나신 날 새벽녘 기억이 더 더욱 생생하다.

왜 그렇게도 쉬이 보내드렸는지, 또 무엇이 그리 급하셨는지 홀연히 떠나신 어머니의 체취가 아직도 가시지 않은 느낌이다.

올 겨울 같이 따스했으면 가시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 날 새벽 기온은 왜 그리도 차가웠는지….

사흘을 꼬박 소화가 안 되신다고, 감기기운도 있는 것 같다고 하셔서 그날만은 꼭 아침 아홉시에 외출하시기로 하셨는데, 일주일에 세 차례, 늘 하시던 대로 여명(黎明)도 없는 시간에 자리를 털고 일어나셔서, 혈액 투석(透析)길에 나서시겠다는 어머니를 몇 차례 말리지도 못하고 모시고 나가던 길이었다.

현관으로 나서시다가 화장실을 들르시겠다고 되돌아서시기도 했다. 신발을 신으실 때는 아들이 한 번 신겨드리고 싶다고 하는 것도 굳이 괜찮다고 하신 분이, 현관문을 열자마자 가슴이 답답하다고, 의자에 앉았다가 가자고, 그러셨던 어머니가 고이 앉은 채로 가셨으니, 황망히 119를 불러 병원에 가셔서 젊은 의사 두 명이 겨울 땀을 흘리며 응급처치를 했건만.

가신지 6년이 지난 지금, 하루에도 몇 번씩 어머니 생각이 나는 것을 어쩌랴. 중3 때였다. 갑자기 전 재산을 날려 온갖 고생을 할 때, 우리 어머니는 먹거리가 부족하여 갓 낳은 막내 여동생에게 젖을 주지 못하였다.

당신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비몽사몽간(非夢似夢間)에도 16Km나 되는 고향 시골 논까지 걸어가서 벼 끝의 낟알을 홀태로 훑어와 6남매의 끼니를 해결하면서도 아들은 학교에 가야 한다고 얼씬도 못하게 하셨던 어머니였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가고 싶다는 아들을 말리고 말려 학비가 가장 싼 사범대학에 가야 한다고 타이르고 타일렀던 어머니였다. 산성시장 안 10여평 좁은 집에서 여덟 식구가 살아도 언제나 화목하게 지낼 수 있도록 모든 시름을 떠안았던 어머니, 좁은 옥상 한 모퉁이에 호박, 고추, 오이를 심어 살림에 보태셨던 어머니였다.

지독한 일제 식민시대에 궁벽한 시골에서 태어나셔서 생사가 갈리는 혹독한 전쟁도 겪어내신 어머니, 간신히 초등학교를 마치시고 또 역시 시골로 시집가셔서 인생의 황금기를 논밭을 일구셨던 어머니, 자식들을 가르치자고 이사 온 읍내에서는 전 재산을 날려 더 큰 고통을 받았던 어머니…

칠십이 훨씬 넘어 용기내서 떠나셨던 중국 황산 여행길을 다녀오셔서는 “내 다시는 외국 여행 안 할란다” 하셨던 어머니, 손자가 장가드는 것을 보는 것이 소박한 꿈이라고 하셨던 어머니, 증손자를 한 번만이라도 안아 보면 소원이 없겠다던 어머니에게, 증손자를 안아보게 해 드리기는커녕 손자가 장가드는 것도 못보고 가시게 했으니 이런 불효자가 없다.

혹시 마음이 가벼워질까, 마지막 가시는 관 속에 좋아하시던 꽃을 가득 채워도 보았다. 곱게 단장하신 어머니를 눈물로 염습(斂襲)할 때는 영원히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약속으로 이마에 입맞춤을 해 드렸다. 그 약속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이 글의 제목을 붙일 때 그렁그렁했던 눈물이 흐른다. 여전히 밖에는 비가 내린다. 아무래도 졸고를 마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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