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7월이 되었다. 소서(小暑)를 지난 날씨는 매일같이 폭염주의보가 발령될 정도로 무더워져서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나고, 그늘을 찾게 된다. 열사병의 큰 고통을 받아보지 않는 사람들도 요즘 날씨가 마치 인생 험로(險路)를 걷는 것과 같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이나, 한국전쟁의 상흔(傷痕), 그리고 ‘보릿고개’라는 기근(飢饉)의 고통을 겪어본 사람들이 볼 때는 한낱 투정에 불과할 뿐이다.

지난 6월 24일 공주향교에서 ‘공주의 역사 인물’ 중 오강표 열사(吳剛杓 烈士)의 토론회가 있었다. 필자도 참석하여 토론 발표를 하였는데, 토론 원고를 작성하고 당일 발표를 하면서 소회(所懷)가 참으로 컸다.

오강표 선생은 1843년에 태어나 공주시 사곡면 월가리에서 살면서 유림(儒林)으로 활동하던 중 67세 되던 1910년 10월 16일 밤에 공주향교 강학루에서 한일합방 조약의 부당함을 주장하며, 목을 매 자결하였다. 평생을 ‘의(義)를 취하라’는 맹자의 가르침을 목숨을 걸고 실천한 것이다. 오강표선생의 자결은 당시 공주에 있는 관청과 주민들에게 엄청난 경종(警鐘)을 울렸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은 오강표에게 죄인이다”라고 하였다.

선생이 자결하기 전 유서로 남긴 ‘절명시’에 “비록 살아서 조선 땅을 되찾는 것은 어렵다하나 일본사람이 되는 것을 어찌 볼 수 있는 일이겠느냐!”고 하면서, “원컨대 우리 2천만 동포는 총궐기하여 주권을 되찾아야 하느니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볼 때 공주의 인물 오강표선생은 단순 자결이 아니라 당시 사림(士林)으로서, 선비로서의 ‘노블레스 오블리제(Noblesse oblige)’를 실천한 것이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본래 ‘고귀하게 태어난 사람은 고귀하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으로, 나라가 위태롭게 되면 귀족이 먼저 나서서 구국(救國)의 충정(忠情)을 실천해야 한다는 과거 로마제국 귀족들의 불문율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노예와 다른 점은 단순히 신분이 다르다는 게 아니라, 사회적 의무를 실천하는데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제의 사례가 많다. 조선시대 흉년으로 인한 기근으로 식량난에 허덕이던 제주도 사람들을 위해 전 재산으로 쌀을 사서 나눠준 거상 김만덕, 집안의 노비를 해방하고 민족자립을 위한 무장투쟁을 이끌었던 김좌진,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고 하여 4대에 걸쳐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 했던 경주 최부자댁, 정경유착, 탈세, 마약생산을 절대로 하지 않았다는 유한양행 설립자 유일한 등 등 무수히 많다.

공주에도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 했던 훌륭한 분들이 왜 없었겠는가? 조선 시대 가난을 이기지 못해 강도짓을 한 사람을 처형하지 않고 오히려 곳간에서 곡식을 내어 주었다는 전주이씨 덕천군의 일화, 공주향교가 불타 소실되었을 때 어린 아들들의 이름으로 재산을 출연하여 지금 자리에 공주향교를 다시 지을 수 있게 하였던 공산이씨 가문 등 등 많은데, 그 중 한 분이 무이재(無貳齋) 오강표 의사인 것이다.

공주에서는 1919년 3월 14일 유구에서 황병주의 주도로 약 500명의 독립만세운동의 시작으로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의 공주시장 독립만세운동, 그 해 4월 1일 정안 석송의 독립만세운동에 이어 장기, 의당, 계룡, 우성, 탄천, 경천 등지에서 연인원 1만명 이상이 독립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당시 공주 인구의 1/10 정도가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으니 독립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오강표 열사의 절명 항일의지가 100년 전 공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 분의 자결을 통한 강한 의지가 불과 9년 후에 있었던 공주 만세운동에 영향을 주지 않았을 리가 없다.

요즘같이 살기 좋다는 때에 공주에 절대빈곤 학생이 많고, 일자리가 없거나 질병, 노환으로 고통 받는 시민도 많다고 하니, 오강표 열사의 유지(遺志)를 승화하여 현 시대에 맞는 노블레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려는 뜻있는 인사(人士)가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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