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백제문화제 ‘한류원조 백제를 즐기다‘에 붙여

[백제기악과의 인연]

1990년 나는 돈황학회[당시 회장 이수웅]를 따라 돈황 일대를 답사하게 되었다. 돈황을 비롯하여 투르판, 우루무치 등을 여행한 것이다. 2007년에는 백제기악보존회의 이름으로 심우성[1934~2018] 선생이 동문선에서 《백제기악》이란 책을 펴냈는데, 나도 참여하였다. 중국 낙양성 일대의 무덤의 도용을 문헌을 정리한 것이었다. 이후부터 나는 본격적으로 백제기악에 대하여 탐구를 시작하였다. 다시 돈황을 다녀옴은 물론이고 중앙아시아와 운남, 그리고 동아시아 해안선도 살펴보았다. 1997년 나는 교환 교수로 몽골에 아카데미에서 머물기도 한 바 있다. 하여튼 이런 답사 활동을 10차례 한 것이다.

여기에 쓴 글들은 이런 답사의 소산이라 보면 좋을 것이다.

[‘한류’의 자생적인 출발점]

문화에 있어서, ‘한류’란 한자로는' 韓流'이고, 요사이 말로는 한국 문화의 패션Fashion이란 말이다.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유행하는 한국 유형이란 의미이기 때문이다. 한류를 살피기 전에, 우리나라[한국]에서 자생적인 어떤 형태의 유풍이 있었는지 알아야 보아야겠다.

한류의 맨 앞에 놓이는 것은 아마도 ‘공후인??引’이라는 고조선의 노래 연주일 터이다. 그럼에도 이 노래는 그 채록이 후대[진晉]에 기록되었다는 점에서 국문학계에서조차 확신을 가지지 못하여 아쉽다.

그 다음 줄에 놓이는 한류는 《후한서》기록[후한 시대25~220년] 에 나타난 축제들이다. 부여의 영고迎鼓[136년], 고구려의 동맹東盟[무제(BC 147~BC 87) 때] 예의 무천舞天, 마한의 5·10월제月祭, 진한의 속희俗戱등이 있다.

이러한 한류에 대한 기록은 《삼국지》에서 제시된 것들이다. 이들은 중국인들에게 알려진 문헌 기록상의 한류일 뿐이다.

실제 외국에 나가 한류를 보인 것은 불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한류의 문화형태로 ‘가[악기 포함]무’와 ‘백희’가 실재하였다는 것은 사실임이 틀림없다.

[‘백제기악’의 형성과 분류]

‘기악伎樂’은 인도어 V?dya의 번역어이다. 이 용어를 처음 번역한 사람은 308년 축법호竺法護Dharmarak?a[서진 265~316년에서 활동]일 것이다. 일본에서 612년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처음 전수해주면서 ‘기악무伎樂?’[출전《일본서기》]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은 300년 뒤의 일이다.

그러면 기악의 공연 형태가 아직도 혼란을 겪고 있는 중이다. 연극인가? 춤인가? 노래인가? 놀이인가? 일본 학자들이 기악이 ‘연극’ 즉 ‘가면극-무언극-마당극’이라고 규정한 결과로 혼란이 가중되었다.

기악을 한 단어로 말한다면 ‘한류’라면 적절할 것이다. 노래와 춤을 주로 하고 놀이와 패션을 종으로 삼는 형식 즉 ‘한류공연’인 것이다. 예컨대 한류 즉 K-Pop과 같은 공연 모습을 연상하면 좋으리라 여겨진다. 노래인지, 춤인지, 놀이인지 섞여 있다. 이것이 오늘까지 연구된 기악의 모습이다.

위와 같은 인식을 가진다면, 백제기악의 전혀 다른 범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백제기악은 3부류가 된다.

1) 자생적인 발생[마한의 기록으로 확인]으로 성립된 백제기악[예컨대 후대의 백제금동대향로의 5악사와 전씨계유명 아미타불의 8악사[혹은 7악사]

2) 308년 인도 불교문헌의 번역에서 시작하여 돈황벽화에 나타난 기악 유형인 백제기악

3) 612년 미마지가 일본에 전해준 가면기악이 1957년에 문헌으로 역수입되고 2001년부터 공연에 올려진 백제기악

지금까지 논의하는 모든 ‘백제기악’이 예외없이 3)의 유형이다. 이 이론 소개는 이혜구[1909~2010]가 공연 제안자는 심우성[1934~2018]이다. 필자는 이 유형을 ‘미마지기악’ 혹은 ‘가면기악’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1)2)의 유형은 구중회[1946~2019현재]가 설정하여 공연을 기획[‘백제궁중기악’한 바도 있다] 하였다. 필자는 1)을 어라하[백제어 임금] 기악으로 2)을 서역 기악 혹은 불교 기악으로 부르기로 한다.

[‘백제기악’이 활약한 3대 국제도시들]

요사이 고고학자 중심으로 백제문화를 ‘동아시아’와 연결시키는 것을 본다. 그러나 그것은 좁은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적어도 백제기악의 활동 중심 무대는 동아시아가 아닌, 당시 국제도시인 중국의 장안長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동아시아인 중국의 남경[당시는 建康]이나 일본의 나라奈良인 것도 사실이다. 이들을 세 도시를 중심으로 한류의 국제적인 활약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 장안 시대

- 북주[577년]의 ‘국기國伎’와 수·당 7·9·10부기部伎로 참여

장안은 전한[BC 202~AD 9] 이래로 서위[535~557]와 북주[557~581]를 거처 당[618~907]까지 여러 국가들의 서울로 당시 가히 국제적인 도시로 그 역할을 해왔다. 특히 북주부터 당까지 백제기악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고구려와 백제의 기악 악단이 중국 본토에 소개된 것은 436년이라고 중국 학자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즉 북조 국가인 북위[386~534]가 북연[409~436]을 멸망시키면서 북연에 있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기악을 가져간 해로 계산하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북연은 고구려[BC 37~AD 668]와 국경선을 맞댄 국가여서 고구려와 백제의 기악이 궁중에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북위에 들어와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기악은 동위[534~550], 서위[535~557], 북제[550~581]의 이어왔는데 577년 고구려와 백제가 기악 악단을 직접 보내자 북주에서는 ‘국기國伎’로 삼았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일본인 학자 도변신일랑渡邊信一郞이 2013년 펴낸《중국고대의 악제와 국가》에 의하면, 북주의 7기는 다음과 같다.

1) 서량기, 2) 천축기, 3) 백제기, 4) 고[구]려기, 5) 구자기, 6) 안국기, 7) 소륵기[혹은 강국기]

이들 ‘국기 7부’는 594년 수[581~618]의 ‘7부기’ 즉 1) 국기, 2) 청상기, 3) 고[구]려기, 4) 천축기, 5) 안국기, 6) 구자기, 7) 문강기] 모체가 되었다. ‘국기 7부’가 ‘7부기’로 변화한 것은 북주에 왔던 해외 악단을 모두 통합하면서 소위 중국의 언더그라운드[속악] 악단인 청상 악단을 편입시키면서 오늘날 뉴욕의 악단 그룹과 유사한 공연 형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방식으로 말하자면 뉴욕의 카네기 홀에서 한국인의 공연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수의 7부기에는 백제기악이 빠지는 대신 당시 공연으로 백제의 ‘호선무’가 초대되었다는 사실이다. 호선무는 이름 그대로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오랑캐의 춤’이라는 의미이다. 호선무는 본래 중앙아시아의 국가인 강국의 춤인데 어째서 백제의 춤으로 초대되었는지 여간 궁금하지 않다. 호선무의 유행지역을 보면, 고구려, 백제, 안남[베트남] 등으로 동아시아로 확산된 것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594년 수의 7부기의 ‘문강기’의 등장이다.

부모은중경 기악의 모습. 중앙은 춤꾼, 왼쪽은 연주자, 오른쪽은 기원자

이후에는 ‘예필’로 불리기도 했는데 주로 가면을 쓰고 공연하는 것이었다. 일본의 가면기악이 이 부분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일본 학자들은 일본의 미마지 기악에 대하여 이 부분을 소홀히 하고 있다는 점을 밝혀두기로 한다.

? 남경[백제시대는 건강建康] 시대

- 남조의 백제기악 수입

대체적으로 중국의 남경은 웅진·사비백제[475~660] 시대에 건강建康으로 불렸다. 지금도 그곳을 가면 혀를 길게 빼고 큰 무덤 양 쪽에서 무덤을 지키는 유물들을 볼 수 있다. 이곳은 동진東晋[317~420] 시대와 남북조[420~589] 시대의 중심지였다. 백제와 활발하게 교류를 하던 지역이기도 하다.

상식적인 선상에서, 백제는 적어도 문화적 측면에서 중국의 그것을 유입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 역사상의 기록은 그와는 정반대이다.

a 유송[420~479]은 고구려와 백제기악를 수입하여 이를 확보하고 있었다.

b 북위[386~534]가 북연[406~436 탁발씨 왕조]을 평정하고 역시 이[기악]를 얻었으나 갖추어진 것은 아니었다.

c 북주[556~581]가 남제[479~502]와 북제[550~577]를 멸망시키고 그 기악을 받았다.

d 수나라 문제[581~604]가 진[557~589]을 평정하고 청악 및 문강예필곡을 얻어 9부기에 배열하였다. 그런데 백제기는 여기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이 기록은《구당서》[권29 음악2]에서 꺼내온 것이다.

왜 중국인들은 백제 기악을 그들의 궁중의 영역으로 끌어드리려 노력을 하였을까? 그 원인은 한두 가지가 있다고 여겨진다. 중국에서는 ‘패관’ 제도가 있을 정도로 노래를 수집하는 풍속이 있었다. 임금이 정치를 하는데 민심을 알아 보기 위함이라고 알려져 왔다. 다른 이유는 후한[25~220]이 멸망하면서 소위 ‘예붕악괴禮崩樂壞’라는 피해의식에 빠져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나라를 멸망시키면 그 나라의 음악을 수집하여 없어진 ‘한의 예악’의 편린을 찾아 원형을 회복하고자 하였다.

북주의 ‘국기’ 모습., 중앙이 춤꾼이고 좌우에는 연주

이러한 현상은 남조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동진[317~420]을 멸망시킨 유송[420~429] 이래로 이러한 태도는 더욱 극성을 보였다.《송사》지志에 예지와 악지에서 그 의지가 드러난다. 8음[쇠, 돌, 실, 가죽, 대나무, 바가기, 나무, 흙] 악기를 정비하고 춤을 다시 정리하는 것이 그 증좌이기도 하다.

하여튼 백제 기악은 남조 국가인 유송을 비롯하여 제[479~502], 양[502~557] 후량[555~587] 진陳[557~589] 등이 끊임없이 이어온 것이 틀림없다. 결국 수와 당에 이어지면서 후기에서 ‘14악’의 하나로 활약하였다. 이러한 터전을 마련한 것이 남경시대이다.

? 나라[奈良] 시대

- 일본 大和國의 수도, 飛鳥문화의 성행지

미마지가 612년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기악무’는 그 내용을 알 수 없다.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은 1223년 고구려계 사람으로 알려진 박근진?近眞[1177~1242]의《교훈초敎訓抄》에 소개된 길놀이行道식의 줄거리이다.

《교훈초》는 10권으로 구성되었는데, 앞의 5권은 가무歌舞 구전口傳이고 뒤의 5권은 영악伶樂 구전이라고 한다. 제1~3권은 박?씨 종가에 전하는 무곡舞曲을, 제4권은 다른 종가에 전하는 무곡을, 제5권은 고려악을, 제6권은 악곡만 전하는 곡을, 제7권은 무악 전반에 관련된 주의사항을, 제8~10권은 악기와 악곡에 전하는 이야기들을 실었다.

공주에서 공연된 백제기악

전체의 구성이 1) 사자獅子, 2) 오공吳公, 3) 금강金剛, 4) 가루라迦樓羅, 5) 바라문婆羅門, 6) 곤륜崑崙, 7) 역사力士, 8) 대고大孤, 9) 취호醉胡, 10) 무덕악武德樂 등이다. 원박아源博雅[918~980]의《신찬악보新撰樂譜》[966년]와 등원사장藤原師長[1138~1192]의《인지요록仁智要錄》등에는 10) 무덕악이 빠져 있다. 그런데 이 무덕악은 춤이 없다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일은 ‘불교포교’용이 기악인데 역사가 남근을 휘두르는 춤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남근의 모형을 끈으로 묶어서 당기기도 하고 때리기도 하며 의기양양하게 춤을 춤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를 석가의 남근이라고까지 이르게 된다.

有光家에서는 기악은 8곡이라고 한다. 그 까닭은 곤륜과 역사를 하나의 곡 가운데 넣었기 때문이다.

이 인용문을 보면 곤륜과 역사의 사이에 새로운 요소가 개입되는 암시가 있다. 한편으로는 역사가 지니는 금강저金剛杵의 예술적 표현이라는 생각도 든다. 즉 불교의 타락을 풍자한 것이라 하겠다. 하여튼 미마지가 처음 전해준 형태가 아니라 후대에 이 부분이 들어가지 않았는가 싶다. 박근진은 미마지가 전해준 가면기악이라고 하였으나 이는 한 번 살펴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기악은 일본의 전통연희의 출발점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이상과 같이 백제기악이 오리엔트의 공연 문화 즉 한류로 사로잡은 것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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