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6월 9일 10시 숭덕전崇德殿[송산리 고분군 뒷문에 위치]에서 무령임금 제삿날 행사가 열린다는 초대장을 받았다. 무령 임금이 523년 음력 5월7일에 돌아가셨으니 1496주년이 되는 셈이다.

  축하를 올리는 의미는 4국[백제·고구려·신라·가야] 시대에서 무덤과 국기일國忌日[임금이나 그 아내가 돌아가신 날]을 제대로 아는 것은 무령 임금밖에 없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 족보가 뚜렷한 것이다. 

  최근 각 지자체에서는 자신의 문화콘텐츠로 색깔이 있는 축제Festival을 찾아내고자 고심하고 있다.

그런데 대체적으로 그 ‘족보族譜’가 있는 축제는 드물다. 매년 거행되는 백제문화제만도 역시 원래 족보는 없고 새로 만들어진 족보를 쓴다. 그래서 부여에서도 백제문화제가 열리고, 전라북도의 익산이나, 전라남도 즉 백제 영역에 속하였던 어디에서 백제문화제를 열려도 시비가 할 수 없는 이유는 족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령 임금 국기제’는 우리 공주만이 열릴 수밖에 없다. 무령임금 무덤이 있고 그 안에 매지권 혹은 ‘국기판國忌板’이 현품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임금께서는 523년 5월7일에 돌아가셔서 525년 8월12일[갑신]에 28개월장[역사학계에서 27개월장이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이 장제는 남조의 유송제도를 본받은 것으로 당시 유행했다. 자세한 것은《풍속문화로 만난 무령임금 무덤의 12가지 비밀》참조]으로 모셔지다가 현재 자리에 묻혔다.

조선 시대에는 임금이나 그 왕비가 돌아가시면 빈전殯殿[신분 등차에 따라 빈궁殯宮, 빈소殯所로 달리 불린다.]에 모셔지고 무덤에 모시고 혼백만 모시는 곳은 혼전魂殿[역시 혼궁魂宮, 영실靈室이라고 불렸다.]이다.

무령 임금의 빈전은 정지산에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따라서 523년부터 정지산에서 모셔지다가 525년 이후에는 529년까지 무령 임금 무덤 안에서 모셔진 것으로 추측된다.

임금의 왕비가 526년 11월에 돌아가셔서 529년 2월[역시 28개월장이다]까지 빈전에 모셔진 뒤에는 무덤이 영구적으로 봉쇄되었을 것이다. 임금 내외는 백제가 멸망한 뒤에서 대통사가 없어질 때까지 불교의 관례대로 계속해서 모셔졌을 것이다.   

무령임금 무덤 매지권 혹은 국기판?

지금까지 무령임금 국기제의 전통을 적어보았다. 조선시대 국기일의 풍속은 비교적 소상하게 알려져 있다.
 
  국기일에는 전국적으로 가무·음주 등 환락이 일체 법으로 금지되었다. 그 밖의 모든 도살도 금지되었다. 그리고 궁중에서는 국기제國忌祭가 거행되고 임금의 능침[무덤의 봉분을 ‘능’이라고 하고 제사를 모시는 사당을 ‘침’이라 한다]에 참배 등이 있었다. 국기제는 고려시대에는 불교의식으로 조선시대에는 유교의식으로 거행되었다.

  조선시대는 임금과 그 선조들[목조, 익조, 탁조, 환조]과 추존[덕종, 장종, 진종, 익종] 34분과 왕비 46분의 국기제가 있었다. 

   따라서 무령 임금 국기제는 나라가 세워져 일제 시대 이전까지 한 번도 끊어지지 않고 유지되던 나라 풍속이었던 것이다. 공주가 역사문화콘텐츠로 ‘무령 임금 국기제’를 부활한 것을 어찌 축하祝賀하지 않겠는가?

  필자는 개인적으로 2011년부터 2018년까지 국기제를 지내왔는데 이제 공공기관으로 이전되었으니 이제 허리를 펴고 싶다. 공주의 역사문화콘텐츠로 영원히 지속되면서 공주들의 삶에도 풍요가 깃들기를 기대고 때문이다.

                     2013년 알릉의 모습

  다만 아쉬운 점은 ‘대제大祭’라는 용어이다. 독창적인 문화상품을 개발하고 나서 개성이 없는 일반적인 문화상품으로 만든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족보’를 가진 역사문화콘텐츠를 ‘가짜 족보’를 가진 일반적이고 평범한 역사문화콘텐츠로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이다 보면, 오시는 ‘손님들’이 젊은이들보다 노인들만 참석하기 때문이다. 젊은 학생들이 관심을 끌 수 있는 역사문화콘텐츠인데 말이다.  

  참고로, 해월스님의 “공주의 지식인들은 잠자고 있습니까?”라는, 《특급뉴스》기사[2019. 6. 3]에 대하여 한 마디 소감을 남기고자 한다. 우선 스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말을 올리고 싶다.

  더불어 필자는 해당 연구 영역인 학자로서 심한 부끄러움과 수치심을 갖고 있다는 점도 밝히고 싶다.

늦게 깨달은 해당 시청의 문화재 담당자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금까지 공주시의 문화정책 가운데 무형문화재에 대한 것들을 보면 적지 않은 오류가 발견된다.

예컨대 백제문화제에서 청룡·주작·백호·현무등에 혼란이 생긴다든지, 백제임금의 수중거둥 행렬에서 임금에게 일산이 없다든지, 2019년 학술세미나를 2000년대 지식으로 연다든지, 스님이 지적한 온조왕의 묘호를 숭렬전崇烈殿으로 하지 않고 신라시조의 묘호인 숭덕전崇德殿이라 한다든지, 이들은 결코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는 시청 담당자를 나무라기보다 ‘자문해준 비전공자’에 대하여 신중을 기하라고 당부하고 싶다. 이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특히 무형문화재의 경우, 자문기구 내지는 소위원회를 두어 우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기대해본다. 
 
  조선 초기에 사전으로 편입되어 형성된 소위 ‘숭보8대전崇報8大殿’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치기로 한다.

  숭령전崇靈殿[국조 단군 및 고구려 시조 동명왕]/ 숭인전崇仁殿[기자]
  숭덕전崇德殿[신라 시조 혁거세왕]/ 숭신전崇信殿[탈해왕]
  숭혜전崇惠殿[알지왕,문무왕, 경순왕]/ 숭선전崇善殿[가락국 시조와 왕후]
  숭렬전崇烈殿[백제시조 온조왕]/숭의전崇義殿[고려 태조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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