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자의 동작치유 마흔 두 번째 이야기

5월말 집으로 향하는 길목에는 하지를 알려주는 감자꽃이 한창이다. 또한 여린 연둣빛 감꽃이 살포시 잎 사이로 얼굴을 내보이며 꽃들의 언어인 향기로 손을 들어 흔든다.

십여 년 전 나는 여름휴가 겸 묵언수행을 계획했다. 마침 알고 지내던 공주대 교육학과 최교수님께서 조용한 암자를 소개해주셨고, 나는 일주일간 내소사에 있는 ‘지장암’이라는 곳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른 새벽, 예불대신 비구니 주지스님께서는 오카리나를 부셨다. 전나무숲 향과 오카리나 협주곡은 다시 생각해봐도 커다란 울림이었다.

지장암은 큰 절이 아니었기에 비구니스님 세분과 공양보살님, 나, 그렇게 총 여자 5명의 공양했다. 이 때의 모습은 지금까지 나의 머릿속에 정지된 사진처럼 기억돼 있어 언제나 꺼내볼 수 있는 추억 중의 하나다.

반찬은 스님께서 키운 피망고추 2개, 깻잎 5장, 된장 그리고 석박지처럼 크게 썬 강짠지(짠무), 그게 다였다.

첫날은 근사한 송화차를 얻어 마신 덕분(?)에 속세의 때를 벗기려 품위 있게 배고픔을 참았다. 그러나 이틀 저녁이 되자 배고픔을 어찌할 수 없어 몰래 슈퍼에 내려와 초코파이 3개와 바나나우유로 하루한번 3일 동안 허기를 달랬다. 그때의 초코파이와 바나나우유의 맛은 나에게 특별한 향기와 기억으로 다가온다.

슈퍼에서 음흉하게 몰래 사먹은 바나나우유의 은은한 향과, 초코파의 달콤함은 암자로 가는 길을 즐겁게 안내했고, 어렴풋이 보이는 하얀색과 미색을 섞은 듯한 꽃무리가 뭉게구름처럼 무리지어 피어있었다.

야생화를 좋아한 나였지만, 그 꽃은 처음 보았고, 향기 또한 처음이었다. 다음날 그 꽃의 이름을 스님께 여쭈어보았더니 ‘노란인동’이라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 다음 해 노란인동을 심었다. 인동은 두해동안 꽃을 보여주지 않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그렇게 날 속 태웠던 노란 인동은 십여 년이 지난 지금 돌담을 잘 타고 올라 해마다 나에게 안부를 전해준다.

한때 갈등했던 그 어떤 어려움이 없었다면, 난 묵언수행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토록 달달한 바나나우유와 초코파이 향기, 노란 인동의 추억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5월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 추억과 하얀 감자꽃, 노르스름한 감꽃, 처음에는 하얀색이었다가, 질 때가 가까워지면 노란색으로 되는 노란인동을 볼 수 있어서.

언제나처럼 이 꽃들이 따뜻한 향기를 품은 듯 느껴지는 것은 내가 가슴앓이 할 때 함께했던 꽃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더 더욱 이 5월을 사랑한다.

어둠속에서 소리가 잘 들리듯 아픔, 고통, 그리고 역경 속에서의 성숙은 결국 삶의 향기로 변한다는 것을 십여 년 전 노란 인동 꽃의 향기가 나에게 가르쳐주었다.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끝을 향해 성실히 달려가면 자연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을 감싸주고, 자기 고유의 향기의 빛은 절대적인 경험에서 비롯됨을 알게 해 주는 것 같다.

삶에 건성인 사람들에게는 그 맛을 보여주지 않고, 많이 아파하고, 많이 힘들어 할 때 조그마한 숨구멍을 통해 길을 보여 주는 것 같다.

나는 그때 그 길을 안내하는 첫 방법이 집중과 몰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것을 학습하는 삶이 얼마나 근사할 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 동작치유의 마흔 두 번째 이야기라고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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