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는 문화콘텐츠가 사람들 삶의 유행과 정체를 만들어가는 시대이다. 그 대표적인 현상의 하나가 ‘한류’라 할 것이다.

612년 일본 나라奈良는 백제인 미마지味摩之가 ‘기악무’라는 한류를 만들어냈고 이들은 새로운 모습으로 1950년대 한국에 다시 상륙하여 2000년대 공연 문화 상품으로 ‘백제 한류’를 재창출해내고 있다.

이러한 ‘백제 한류’는 백제[BC 18~AD 660]에서 이미 확보된 문화콘텐츠이었으므로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오리엔트The Orient 문화의 중심지 장안長安에서는 ‘백제 기악’이 북주北周[557~581]의 ‘나라 기악國伎’으로 깃발을 흔들고 있었다.

북주의 ‘나라기악’은 백제 기악 이외에도 서량과 구자[이상 돈황 지역 국가] 기악, 천축[인도] 기악, 고[구]려 기악, 안국과 소륵[이상 중앙 아시아 지역 국가] 기악 등 7 나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러한 ‘백제 한류’는 아직까지 거의 알려진 적이 없었다. 이들 기악은 북주가 수[581~618]에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수와 당[618~907]의 정권이 들어서면서 백제 기악은 중국 사람들 원류 문화콘텐츠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직접적인 백제기악은 수나라 7부기악[594년]에서 북주의 나라 기악으로 참여하다가 9부 기악[대업 605 전후]부터는 중국의 기악으로 편입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 9부 기악은 수 나라 양제[재위 604~618]가 즉위하면서 문화콘텐츠인데 이 때 백제는 별도로 ‘동이’[중국의 동서남북의 국가들을 분류하는 방법의 하나로 동쪽 국가를, ‘서융’으로 서쪽 국가를, ‘북적’으로 북쪽 국가를, ‘남만’으로 남쪽 국가를 각각 지칭하였다.]의 대표로 ‘호선무胡旋舞’를 초대하였다. 호선무는 9부 기악이 중궁의 뜰에서 진행된 것과 비교하여 야외의 무대에서 공연되었다.

이러한 백제기악의 장안 활동은 널리 오리엔트 지역에 널리 알려져, 612년에 이르러서는 일본이 미마지를 초청하기에 이르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한국과 중국의 고대사에서 중국에서 문화콘텐츠를 유입했다고 생각해버린다. 그러나 실은 그러하지 않다. 문화란 살아 있는 ‘생물체’이기 때문에 시대나 지역 혹은 대상에 따라 그리 간단하게 유형화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위 중화주의를 주창하던 중국은 북쪽 오랑캐인 선비족 북·서·동위[386~556]에게 나라를 유린당하여 남쪽을 피난을 와서 궁색하게 남조라는 시대구분을 만들어냈다.

그들의 중심이었던 한나라가 망하면서 이른바 ‘예붕악괴’ 즉 예가 붕괴되고 악이 무너져 버렸다. 이후 그들은 나라를 점령하면서 혹은 교류하면서 ‘사라져 흩어진 한나라의 예악 즉 악’을 찾고자 심혈을 기울였다.

남조국가인 유송劉宋[420~479, 북·남송 즉 조송趙宋과 대비하여 부르는 이름이다.]가 ‘백제기악’을 남경[당시 이름은 건강建康]으로 수입해간 것도 이런 맥락에서이다. 북조국가인 북위는 북연[409~436]에 있었던 백제기악과 고구려기악을 장안으로 수입한 것도 역시 같은 이유 때문이다.

일본 학자들은 미마지가 ‘오에서 배웠다學于吳’를 그들《일본서기》의 기록에 대하여 ‘吳’를 ‘吳國’으로 해석하는 촌극이 벌어져 여러 가지 해프닝이 일어났다.

백제와 시대가 동일시대의 오국 즉 천추전국시대, 삼국시대, 5대10시대의 어느 것과도 일치하지 않으니 한국학자까지 동원하여 오의 지역을 국내외에서 찾게 되었다.

그러나 실은 여기서 오는 춘추전국시대 오 지역인 건강 지역을 말하는 것이다. 더 연구가 필요하겠으나 당시 문화적 배경을 살핀다면 ‘오’는 나라이름이 아니라 당시 유행하던 ‘오성가곡吳聲歌曲’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풀이로 하면 부여에서 전승되는 ‘산유화가’가 백제기악이라는 의문이 손쉽게 해결할 수도 있다.

하여튼 백제기악은 오리엔트 문화의 중심지인 중국의 장안과 남경, 일본의 나라에서 맹위를 떨치던 ‘백제한류’가 분명하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이 아직은 어둠속에 갇혀 있다.

이러한 규명 등이 되지 못한 채 아직까지도 남아 있는 것도 국립충청국악원을 설립해야 할 이유의 하나이다.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백제기악은 백제인이 미마지가 7세기에 일본에 전해준 것인데 20세기에 이혜구[1909~2010]가 다시 역수입하면서 연구가 시작되었고 21세기 벽두에 이를 문화상품화한 사람이 심우성[1934~2018]이다.

그런데 보다 깊이 천착하다보니 ‘伎樂’은《후한서》에 교사악郊祀樂[궁중이 아닌 교외에서 올린 제사악]을 춤佾舞을 곁들인 문화콘텐츠였고, 4세기의 불경의 V?dya라는 번역어로 등장하였으며, 그 후 돈황 벽화에 그 모습을 화려하게 드러낸, 살아있는 문화콘텐츠였다.

이를 발견한 사람은 필자[1934~ ]로, 현재《한류발전소 백제기악》을 집필중이며, 2019~2020년 출판될 예정이다. 이는 백제기악의 연구지가 공주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도 국립충청국악원이 공주에 그만큼 인연이 있음을 시사 하는 것이기도 하다.

실제적인 연정국악원과 국립공주대학교 음악교육과가 있어서 이를 연계한다면 콘소시엄의 효과를 누릴 것이다. 이론[대학음악과와 연구자 등]과 실제[연정국악원, 국악기 제작소 등] 그리고 전파[양성된 교육자들의 교육현장]의 3위1체가 될 것이다.

국립충청국악원의 설립이 공주에서 이미 성립되어야 할 필요충분이 갖추어진 셈이다. 이번 참에 신라문화권과 백제문화권의 ‘均衡자(尺)가 수평水平’이 이루어지도록 정부 정책을 촉구하며 간곡하게 당부하는 바이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