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찬의 잼 있는 중국이야기-29

중국을 다녀왔거나, 중국을 조금 아는 사람들의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기죽는’형이다. "중국은 너무나 커. 사람 많고, 물자가 풍부하며, 문화유산이 도처에 깔려 있고(실제로 중국에서 만든 전국 명승지 지도를 보면 서쪽의 산악지대를 제외하곤 명승지 표시로 새까맣게 덮여 있다.)산수 또한 기가 막혀. 점잖고 배짱 있고, 무서운 나라야" 뭐 대충 이런 씩의 평가로 남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은 사람들이 이런 분위기를 좋아한다.

다른 하나는 ‘호들갑’형이다."야 중국 놈들 정말 지저분하더라. 진짜 때 놈이야. “짱골라”라구. 그리고 아직까지 교수한달 월급이 우리 돈 몇 십 만원 도 안 돼. 하루 저녁 술 값도 안 되더라고. 거기다 지폐만 펴들면 쭉쭉 빠진 미녀들이 줄을 서 줄. 이런 사람들은 대개 ‘졸부형’이다.

한국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몇 푼 안 되는 돈으로 풀고 오는 부류들이다. 그래서 노래방에 가서 런민비100원 짜리를 꺼내서 폼을 잡는다. 심지어 얼큰해 지면 100달러짜리 지폐를 팁으로 척척 안겨 주기도 한다. 이러한 사례들은 조금씩 그 차이는 있지만 모두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것이다.

전자는 조상 때부터 물려받은 사대주의 연장이다. 후자는 돈좀 모은 하인 마당쇠가 옛날 상전집 앞마당에서 객기 있게 뱉어내는 자기 비하의 목소리다 .한때 한국에는 이와 같은 자기 비하의 구두선이 있었다. "엽전은 안 돼. 조선놈하고 북어는 패야 돼."이러한 말들은 일본인들이 우리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작성한 시나리오의 한 토막 대사였다.

그런데 우리들이 때로 무심결에 흉내를 내곤 했다. 한편, 이와 비슷한 대사가 현재 중국과 한국의 경우에도 존재하고 있다. "중국애들 봐. 얼마나 만만디야. 우리는 언제나 빨리 빨리가 문제야. 우리는 펄펄 끓는 곰탕도 후후 불어가면서 식혀 먹자나.중국 사람들은 비가와도 안 뛰어 그 비 다 맞아도 산처럼 무겁게 걷지.

"도대체 천천히 하는 것이 빠른 것보다 옳다는 정의가 도대체 어떻게 생길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누가 만든 것인가? 천천히 하는 것이 모두 옳다는 논리라면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에 중국 사람들이 경기에 나오는 이유는 뭔가?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정말 엉덩이에 불 맞은 송아지처럼 씩씩대고, 불 달군 양철판 위의 개미들처럼 빨빨거리는 중국 사람들을 안 겪어 봐서 하는 말일 게다.

우리가 성질 좀 급해서 빨리빨리 서두른다고 해서 나쁠 것이 무엇인가? 이러한 자기 비하적인 말이 적용되는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들은 굉장히 서두르면서 일을 빨리 진행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끝마무리를 대충함으로써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아 답답해서 끌어들인 것이 중국의'만만디'인 것이다. 하지만, 그건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빨리빨리'가 잘못이기 때문에 느린 것이 이상적인 것이라는 논리는 타당치 않다. 문제는 일의 처리가 얼마나 합리적이고 상식적인가로 그 초점이 맞추어지면 되는 것이다. '빨리'가 문제이기 땜에 '만만디'로 대체 되어야 한다는 흑백논리는 또 다른 논리적 오류이다. 그런데 문제는 왜 하필 우리의 '빨리빨리'를 치유하기 위해서 도입된 처방이 중국의 '만만디'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단순한 흑백논리가 빚은 쉬운 답안찾기 사고와 문화적 사대주의가 짝짜꿍해서 만든 결과이다.

오히려 '빨리빨리'는 대단한 에너지원이며, 추진력이다. 요즘 같은 정보화 시대에 승부의 열쇠는 정보를 빨리 수집하고 판단하는데 있다. 시테크가 경제발전의 관건이 되고 있음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지적하는 바이다. 따라서 핸들 조절만 잘하면 자동차는 순식간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핸들 이야기를 해야지 왜 엔진을 느리게 해서 천천히 갈 생각을 하는지?

우리 문화의 심연 속에 깊이 내재해 있는 중국에 대한 콤플렉스는 늘 이런 식으로 노정 되곤 한다. 수 천년동안 너무나 가깝게 지내다 보니 중국에 대해 남모르는 의뢰심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렇게 늘 지도와 편달을 받다 보니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대국의 법도에 들어맞는지 눈치를 보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 그래서 우리의 잘못된 행동을 고치는 데에도 그들의 가치가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구한 말 이후 끊겨진 중국과의 관계가 다시 이어진 지금 우리는 집 잃어 울던 아이가 시장 모퉁이에서 엄마를 다시 만난 것 처럼 중국을 반기고 있다. "참 그동안 이데올로긴가 뭔가 때문에 서로 떨어져 지냈고, 한때는 총 부리도 겨누고 했는데, 이제는 다시 잃어버린 형제의 우애를 회복합시다.

6.25전쟁 때 우리는 일방적으로 당했다. 통일의 진주를 다시 잃고, 또 우리네 부모들이 그들로 인해 보리밭 언덕에서 얼마나 울부짖었던가? 그런데 이제 와서 거기에 대해서는 다시 그 통일논리 때문에 벙어리 냉가슴 앓듯 아무런 말도 듣지 못한 채 잊어버린 듯 용서하고 말았다.

콤플렉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우리의 서울 명칭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자. 중국인들은 한때 ‘서울’을 그들 방식의 표기로 ‘한청’이라 불렀다. 한자나 중국어를 조금하는 한국 사람들 역시'한청'이라 따라 불렀다. 1945년 광복부터 한양은 서울로 바뀌었는데 중국인에게는 아직도'한청'이었다. 우리의 서울을 중국인들은 '한나라의 성읍'정도의 의미로 불렀고, 우리는 그동안 그냥 따라서 '한청,한청'하곤 했다. 최근 들어서는 몇몇 학자들의 노력으로 음역 표기인 서우얼로 바꾸는 쾌거(?)를 달성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교수나 학자 등 이른바 지식 있는 사람들이 아직 이런 한자 표기가 있는지도 모르거나, 중국인이 알아듣지 못한다는 이유만으로 여전히 '한청'이라 부르는데 있다. 이러한 것들이 사소한 것 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자각조차 없는 우리들의 대중국 콤플렉스 현상이다. 좌우지간 우리는 긴 세월을 그들의 한 도청 소재지 정도의 느낌밖에 없던 우리의 서울을 중국인들로 부터 다시 복원시켜야 할 의무와 자존심이 있다.

이제 더 이상 중국에게서 무언가'좋은 말씀'을 들으려고 귀 기울일 필요가 없는 것이며, 그들을 위한 친절한 배려 역시 지나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앞으로 중국을 이야기 할때 무언가 환심을 사기 위해 훌륭한 제목을 붙이고 이야기를 그럴듯하게 풀어 가려는 저자세는 버려야 한다. 그냥 아무런 제목(?) 없이도 우리는 그들과 마주보고 우리의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며, 당당해야 한다.

몇 년 전 중국 전승일 기념식 때 우리의 전~대통령이 시진핑 주석 바로 옆자리에 배석한 사소한(?)사실을 대서특필 했던 뉴스가 아직도 씁쓸하게 들리는 것은 넘 민감한 나만의 지나친 기우일까? 다시 한 번 되새겨 본다. 극복해야 할 문화적 사대주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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