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성에 세워진 박중양과 김관현의 불망비?선정비

공주시에서는 지난 14일 100년 전 3.1운동 재현하는 등 대대적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행사를 펼쳤다. 그러나 정작 친일과거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재 이러한 행사만 거행해 빈축을 사고 있다. 세계유산으로 지정돼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는 공산성에 있는 비석 때문.

공산성에는 친일매국에 앞장선 박중양의 불망비, 김관현의 선정비가 아직도 남아있지만, 공주시민들조차 이러한 사실을 대부분 모르고 있다. 더구나 박중양과 김관현의 친일행적에 대해서는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시민단체, 역사를 운운하는 학자들이 정작으로 무엇이 문제인지를 살펴 청산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보여주기 위한 행사나, 보상이 주어지는 일에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공주시민 조모씨(62,공주시 봉황동)는 "악덕 친일파인 박중양과 김관현의 후손들이 지금도 권력과 재력을 쥐고 떵떵거리며 활개치고 있는 것이 후손들에게 부끄럽기 그지없다“며 ”공주시는 박중양과 김관현의 친일행적의 죄상을 낱낱이 밝힌 팻말을 그 비석 앞에 세워 그 후손들이 두고두고 부끄러워하도록 깨우쳐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3ㆍ1독립운동 100주년을 맞아 공주시는 지금까지도 친일과거 청산을 하지 못한 것을 부끄러워해야 하고, 지금이라도 끝까지 캐내 청산된 역사를 다음 세대에 넘겨주어야만 한다“며 ”그래야만 지금도 당당하게 활동하는 제2, 제3의 박중양과 김관현들을 색출하고, 응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아울러 “공주시가 3ㆍ1절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의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것도 좋지만,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친일과거 행적과 치적비가 유네스코에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공산성 주변에 세워져 있는 것을 알면서도 이에 대한 친일행적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대로 비석을 '모시고' 있는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고 꼬집었다.

공주시 관계자는 이에 대해 "3.1운동 추진위원회와 시민단체들의 의견을 모아 친일과거청산에 대해 토론하고, 고민해 보겠다"고 밝혔다. (이하 박중양, 김관현 관련 기록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중양>

1874(고종 11)∼1959. 한말 관료·친일반민족행위자로, 1874년 경기도양주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반남(潘南)으로, 조선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수양아들이다.

대표관직(경력) 경상북도 관찰사, 중추원 참의, 조선임전보국단 고문,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

생애 및 활동사항

1897년에 관비장학생으로 일본으로 건너가 1900년에 도쿄 아오야마[靑山]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도쿄 경시청에서 경찰제도연구생으로 경찰제도와 감옥제도를 연구 실습했다. 1903년에는 도쿄부기학교에서 은행 업무를 익힌 후 졸업했다. 일본에서 야마모토[山本信]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했다.

이듬해에 귀국해 일본군의 고등통역관 대우가 되어 러일전쟁에 참전해 인천, 진남포, 용암포, 안동현 등지에 종군했다. 1905년에 농상공부 주사가 되었으나 대구에 1년간 거처하였다.

1년 후 군부 군기창 기사가 되어 의친왕이 일본을 방문할 때 통역 수행원으로 일본을 갔다온 후 대구군수 겸 경상북도 관찰사 서리가 되었다. 1907년에는 평안남도 관찰사로 영전했다가 이듬해에 다시 경상북도 관찰사가 되어 대구로 돌아왔다.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충청남도 장관을 거쳤다. 1915년부터 1921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14년에는 충청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18년 5월 대구상업회의소 특별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할 목적으로 대구에서 자제단을 조직하고 단장을 맡았다. 1921년 황해도 지사에 임용되었으며, 1923년부터 1925년까지 충청북도 지사를 역임했다. 1927년부터 1939년까지 중추원 참의를 지냈다. 1935년판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鑑)』에 의하면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식민통치 25년간 최고의 공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다. 1938년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회 위원이 되어 총독의 자문사항을 심의했다. 1941년부터 1943년까지 중추원 고문, 1945년 8월까지 중추원 부의장을 지냈다.

1939년 11월 관변종교단체인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1941년 부여신궁 공사 근로봉사에 참여했다. 이해 10월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報國團)의 고문으로 선임되었다. 1943년 1월에는 국민정신총력연맹의 참여를 맡았으며, 학병을 권유하는 연설대에 참여해 경남지방을 담당하기도 했고, 일본이 싱가포르를 점령하자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싱가포르를 방문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친일 활동의 결과, 1945년 4월 3일에 박상준(朴相駿) 등 6명과 함께 일본제국의회 귀족원 칙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해방 이후 1949년 1월 반민특별위원회에 의해 피의자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나, 며칠 후 폐렴이 발생해 서울대학병원에서 몇 개월간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1959년 4월 23일 사망했다. 일본정부로부터 1906년 서보장(훈6등), 1908년 서보장(훈5등),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 1923년 서보장(훈4등), 1915년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 1919년 서보장(훈3등), 1928년 쇼와(昭和)대례기념장, 1931년 서보장(훈2등), 1935년 조선총독부 시정25주년 기념표창을 받았다.

박중양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2·4·8·9·11·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7: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211∼259)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김관현 [ 金寬鉉 ]>

1876(고종 13)∼1948. 군인·관료·친일반민족행위자로, 본관은 광산. 화평군 김석견의 21대손으로 동중추 김재신의 아들이다. 일본 유학파 출신으로 식민지 시기 군수와 도지사를 지낸 전형적인 행정관료이다.

대표관직(경력) 남양군수, 수원군수, 충청남도지사, 함경남도지사, 중추원 칙임 및 참의

생애 및 활동사항

조선시대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1895년 4월 박영효 등 개화파 정권이 추진한 ‘관비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그해 5월부터 1896년 말까지 게이오 기주쿠 보통과를 마치고 육군 군무 교육기관인 세이조학교에 진학하였다. 관비유학생 중 세이조학교에 진학한 유학생은 총 18명으로, 이들은 1898년 8월 대한제국 정부 군부에 의하여 부교에 임명되어 형식상 군부 파견 유학생이 되었다.

1898년 10월 세이조학교를 졸업하였고, 같은 해 12월에 김교선, 장호익 등과 함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였다. 1899년 11월 사관학교를 졸업, 6개월간 일본군에 배속되어 견습사관 과정을 마쳤으며, 1900년 7월 대한제국 군부에 의해 참위에 임관되었다. 이 시기 정부의 유학생 정책이 변경되면서 더 이상 유학자금을 지원받지 못하다가, 1901년 3월 송환명령에 의해 귀국하였다. 이후 대한제국 친위보병 제3연대에 배속되었다.

1902년 조택현, 장호익 등이 주도하고 일본 유학 청년 장교 15명이 동참한 ‘혁명일심회’에 가담하였다. 이 조직은 친러파 현 정부를 타도하고 고종과 황태자를 폐위한 후 의친왕 이강을 황제로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 와중에 ‘유길준 쿠데타 모의사건’이 발각되어 주도 인물들이 체포되자 1902년 6월 일본으로 피신하였다.

1904년 6월 일본 육군의 한국어 통역으로 발탁되어 러일전쟁에 참전하였다. 전쟁 중 본연의 임무인 한국어 통역뿐 아니라 명령 전달, 탄약 운반, 적정 감시, 직접 전투에 투입되었다. 1905년 3월 부상을 당해 후송되었다. 이런 훈공을 인정받아 일본 정부로부터 하사금 1천원을 받았다.

1905년 8월 대한제국 육군유년학교 학도대에 배속되었고, 같은 해 9월 육군무관학교 시험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육군보병 부위에 임명되었다. 이후 내부 참서관, 내부 회계국장을 거쳤다. 1906년 11월 내부 회계국장 재임 중 일본 특사로 파견된 이지용을 수행한 공로로 일본 정부로부터 훈4등 욱일장을 받았다.

1907년 6월 중추원 부찬의를 거쳐 1908년 1월 경기관찰도 남양군수, 1909년 3월부터 1926년까지 수원군수·함경북도 참여관·전라남도 참여관·충청남도 지사·함경남도 지사를 두루 거쳤다. 관직에서 물러난 후 1933년 12월까지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고문을 지냈으며, 이어 1934년 4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참의에 임명되어 1945년 8월까지 11년 4개월간 중추원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37년 9월 중추원 북지위문단의 일원으로 파견되어 중국 전선의 일본군을 위문하고 돌아왔다. 이때 톈진신사에 참배, 일본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고 일본군 사령관 등을 만나 조선에서의 총후활동을 다짐하였다. 1943년 11월 조선총독부 중추원의 임시특별지원병제도 선전 활동에 참여하였다.

이 밖에 일제의 침략전쟁 선전을 위한 여러 단체에서 활동하였다. 1936년 문명기가 군용기 헌납을 목적으로 조직한 ‘조선 국방비행기 헌납회’의 회장을 맡았고, 같은 해 11월 ‘조선인 징병제 요망운동’ 발기인회에 참여하였다. 1939년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하였고, 1941년 5월부터 일제의 침략전쟁을 후방에서 지원하기 위한 민간단체인 국민총력조선연맹의 평의원을 맡았으며, 1941년 조선임전보국단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다.

김관현의 일제강점기 활동은 2004년 10월 29일 공포된 대통령령 제18571호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제2조 제9·1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Iv-1: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792∼82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저작권자 © 특급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