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전, 3월 1일은 우리가 잘 아는 3.1절이다. 3.1절은 매년 맞는 중요한 기념일이지만, 금년의 3.1절은 특히 더 의미가 깊다. 왜냐하면 올 해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압제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벌였던 3.1절 역사가 100년이 되는 해 이기 때문이다.

정부에서는 광화문에서 ‘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을 열었고, 전국의 모든 지방에서 각 각 3.1절 기념행사를 개최하였다.

우리 공주에서도 기미삼일독립만세운동기념사업회 주관으로 영명학당 강당에서 기념식이 있었는데, 기념식을 마친 후에는 3.1중앙공원에서 유관순 열사 동상을 제막하였다.

100여 년 전 유관순 열사가 재학했던 영명학당에서 3.1절 기념식을 개최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고, 동상을 세워 유관순 열사를 추모하는 마음가짐을 더 더욱 깊게 다지는 것 또한 중요한 일이다.

유관순 열사를 추모할 때 또 한 분, 영명학당의 당시 교사요 독립운동가였던 조화벽 선생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조화벽 선생은 유관순 열사의 올케로, 양양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항일독립운동의 선각여성’이며, ‘개성 호수돈 여학교 비밀결사대 조직의 주역’인 열혈 지사(志士)이시다.

우리 공주는 유관순 열사와 조화벽 지사와의 인연만으로도 자부심을 가지기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 그런데도 공주에는 이 두 분의 열사와 지사 외에도 훌륭한 독립운동가가 매우 많다.

3.1 독립운동이 있기 전인 1919년 2월 영명학당 3회 졸업생인 윤창석이 독립선언을 하다가 일제 경찰에 구속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당시에 공주에서도 대대적인 3.1우동이 전개되었다고 알려지고 있다.

처음 3.1시위가 시작된 이래 한 달 간의 시위 횟수는 12회, 참가인원은 14,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 때 왜경에 의해 학살된 사람이 42명, 부상 90명, 피검자가 4,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공주지구 3.1운동을 주동한 분들은 김수철, 양재순, 유준석(유관순 열사의 사촌 오빠) 등 영명학당 재학생들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천도교도인 황병주 선생이 1919년 3월 14일 유구에서 주도한 독립 만세운동, 4월 1일 정안면 석송리 이기한 선생 등의 만세운동, 장기면, 의당면, 계룡면, 우성면, 탄천면, 경천면 등지의 수많은 지역민들도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와 같은 공주 3.1운동의 민족정신이 계승되어 공주에서는 일제 강점기 내내 항일투쟁이 계속되었는데, 영명 출신 외에도 1920년대에는 공주고보(현 공주고) 재학생이었던 이철하, 이관세, 윤상원, 한흥손, 김송규(작곡가 김해송) 등이 일본인 교장 등에 대항하는 공주 학생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독립운동가 이회영 선생의 아내로 중국에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을 후원한 이은숙여사도 1889년에 공주에서 태어난 분이다. 공주보훈공원에는 공주의 일제 강점기 독립운동가 88명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이 짧은 지면에 공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을 모두 담을 수 없는 것이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그러나 100주년을 맞이한 3.1절에, 목숨 바쳐 우리 민족과 나라를 지킨 선열(先烈)들에게 옷깃을 여미고 지켜야 할 우리들의 마음가짐을 한 번 가다듬어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순국선열들의 희생으로 지킨 우리나라, 우리 공주의 국가와 지역 자존감을 유지해야 한다. 한 예로, 혹시라도 공주지역의 현안 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무조건 외부 세력에 의존하려고 한 적이 없는지 반성해 볼 일이다.

아직도 일상생활과 제도 속에 남아 있는 중요한 일제의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 한 예를 들어 일본의 ‘ようちえん(幼稚園)’에 근원을 둔 ‘유치원’의 명칭을 세계적인 추세인 ‘유아학교’로 변경할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또 한 가지만 덧붙인다면 친일파가 지은 노래까지도 없애거나 바꾸자고 주장하면서 정작 본인은 저급한 일본 문화, 일본 음식, 일본 스타일(머리, 용모 등) 등에 무비판적으로 빠져들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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