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해설사와 함께

지난 15일 제주도를 방문한 필자는 설레는 마음으로 일행과 함께 버스에 올랐다. 꼭 한번 방문하고 싶어 여러 차례 계획을 세웠었지만, 정작 실행에는 옮기지 못했기에 그 설렘은 더욱 크게 느껴졌다.

필자는 관덕정(觀德亭)의 야경이 보고 싶어 일행과의 저녁식사를 서둘러 마친 후 간편복으로 갈아입고 인근에 위치한 제주목 관아로 향했다.

초행이라서 걱정돼 주변을 훑으며 10여분가량 걷다가 먼발치에 보이는 이정표를 발견하고, 한달음에 뛰어 관덕정(觀德亭)에 당도했다.

제주목관아 앞에 우뚝 서 조명을 한 몸에 받으며 떡 버티고 있는 관덕정의 위풍당당한 자태는 필자를 압도해 관덕정과 마주 서있는 나는 한동안 미동도 할 수가 없었다.

한참을 지나고 나서야 관덕정에 올라 570여 년 간 자리를 지켜온 누각의 이곳저곳을 살펴볼 수 있었다.

다음날 호텔에서 출발한지 채 10여분도 안되어 일행을 태운 버스는 제주목관아 앞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니 어제 밤 야경으로 보았던 관덕정이 지난밤과는 또 다른 모습으로 반겨준다.

관덕정은 1448년(세종30년) 안무사(按撫使) 신숙청(辛淑晴)이 처음 창건 한 후 여러 차례의 중수와 보수를 거쳐 내려왔다.

관덕정은 제주방어를 위한 군사훈련을 목적으로 세운 군사 훈련장이자, 제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로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쌓는 일’이라는 뜻의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에서 따온 이름이다.

제주시가지 도로확장공사가 진행되기 전만 하더라도 관덕정 앞은 조선시대 군사훈련을 하던 넓은 마당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관덕정은 1480년 목사 양찬에 의해 중수됐다. 이때 쓴 서거정의 중수기에 의하면 ‘이 정(亭)을 만든 것은 본래 놀이나, 관광이 아니라, 무열(武閱)을 위한 것인즉, 지금부터 제주의 사람은 날마다 사습(射習)을 하되, 과녁을 쏠 뿐만 아니라 기사(騎射)를 익힐 것이요, 기사뿐 만아니라 전진법(戰陣法)을 익힘으로서 ···(이하 생략)’의 내용으로 보아 군사훈련을 하던 장소였음을 알 수 있다.

관덕정은 광복 후 1948년 9월에 제주도의 임시도청으로 사용됐다가, 1952년도에는 제주도의회 의사당과 북제주군청의 임시청사로, 1956년에는 미공보원 상설문화원으로 사용됐으며, 1959년에 국보 제478호로 지정됐다가, 1963년 보물 제322호로 재 지정돼 오늘에 이르고 있다.

관덕정의 위용에 매료되어 있던 중 해설사 한분이 우리를 불러 그리로 이동하니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제주목에 관한 해설을 들었다. 해설사는 제주목의 외대문(外大門)인 진해루(鎭海樓)앞에서부터 문루 앞에 세워진 하마비(下馬碑), 그리고 진해루와 제주목의 역사를 잔잔한 목소리로 성의 있게 설명해 주었다.

공주시에도 공주목 관아터가 있고, 최근에 옛 공주감영 자리에 ‘충청도포정사(忠淸道布政司)’라는 현판이 걸린 누각을 복원했다고 하니 해설사는 더욱 반가워했다.

제주목 관아는 조선시대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다. 탐라국 시대부터 관아시설이 있던 곳으로, 1434년 화재로 전소돼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지만, 일제강점기 때 관아를 헐어 제주도청, 경찰서, 법원 등을 설치하면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없게 훼철(毁撤)됐다.

이를 복구하게된 것은 1991년 발굴조사를 시작한 이후부터이다. 1998년까지 총 4차례의 발굴조사가 이어졌고, 여러 문화층과 함께 문헌상에 나타난 중심건물인 우련당, 홍화각, 연희각, 귤림당 등의 건물터와 유물 등이 대량으로 출토됐다.

제주목 관아는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사실과 탐라순력도(1703), 탐라방영총람(1760)등의 고문헌을 토대로 1999년 9월부터 복원작업을 시작해 2002년 12월에 마침내 복원을 완료해 지금의 모습을 찾게 됐다.

조선시대 당시 제주도는 제주목과 정의현, 대정현의 1목 2현 체제로 편재돼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 하에 있었으나, 지리적으로 전라도와 제주도의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있어 관찰사의 권한 중 일부를 제주목사에게 이양했다.

제주목사는 행정적 기능, 군사적 기능 수행이 강조됨에 따라 절제사의 직함을 사용했고, 형벌 및 소송처리, 세금징수, 군마관리, 왜구방어 등 제주의 모든 행정을 집행했으며, 전라도 관찰사에게는 1년에 2차례 보고했다.

우리는 해설사로부터 “1526년에 이수동 목사가 화재에 대비해 우련당 앞에 연못을 만든 연유와 ‘연못으로 모여든 개구리의 울음소리가 시끄럽다’며 연못을 다시 메우게 했다는 양대수 목사와 얽힌 설화, 그리고 그에 따라 생긴 ‘양대수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제주지방에서 회자되는 속담의 유래를 설명 들으면서 목적이 있어 만들어진 것을 개인적인 이유로 본래의 목적을 망각하고,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얻었다.

‘우련당’은 연못이 만들어진 1526년 이후에 세워진 정자로, 연회장소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중대문을 지나면서 과거에 건물이 있던 터에 주춧돌이 놓여 있어 건물들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었다. 중대문 뒤편에서 왼쪽으로 가면 홍화각(弘化閣)이 나온다. 홍화각은 ‘왕의 어진 덕화가 백성들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홍화각’은 관아건물 중에 가장 웅장했으나, 일제에 의해 훼철됐다가,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됐으며, 절제사(목사가 겸한 군사직)의 집무실이 있었다.

연희각(延曦閣)도 목사가 집무하던 곳으로, 목사의 근무 복식과 문서 작성에 필요한 도구, 각종 서류 보관함, 생활도구 등이 잘 정돈 진열돼 있었다.

연희각은 목사가 영(令)을 내리고 형(刑)을 주관하던 곳으로, 목사의 권위를 상징하듯 다른 건물에 비해 기단이 높아 마당을 내려다보도록 건축되어 있었다.

이밖에도 임금님이 계신 한양성을 향해 감사를 드리며 예를 올렸다는 망경루, 거문고를 타고, 시를 읊으면서 술을 마시던 장소였다는 귤림당, 목사를 보좌하는 군관들이 업무를 처리하던 영주협당 등의 건물들이 복원돼 있었다.

이처럼 늦게나마 제주목을 복원할 수 있었던 것은 ‘탐라순력도’라는 화첩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탐라순력도’는 조선시대의 화첩으로, 보물 제652-6호이며, 제주도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사료이다.

‘탐라순력도’는 이형상 목사가 제주목사로 부임해오면서 화공 김남길에게 명하여 그린 그림으로, 제주목관아는 물론이고, 당시 제주의 생활모습까지 고스란히 담겨있다.

예로부터 섬은 지독하리만치 자기 것을 굳건히 지키려는 강한 특징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로운 문물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이를 다른 곳으로 전파하는 통로 역할도 했다. 제주 역시 이런 섬 특유의 이중적인 문화가 강하게 영향을 미친 곳이다.

제주목 관아와 관덕정은 제주 특유의 문화를 지키면서도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고, 이를 다시 제주만의 것으로 만들어내던 곳이었다.

한양의 경복궁과 광화문 역할을 하던 제주목관아와 관덕정은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를 지나 근현대사에 이르기까지 중앙 문물의 도입을 비롯한 정치·문화·사회의 중심지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 왔다.

2002년에 복원 정비된 제주 목관아는 이제 제주도를 찾는 관광객들의 방문코스중 하나로 각광을 받고 있었다.

동절기를 제외한 계절에는 각종 프로그램이 관아의 안팎에서 펼쳐지고, 특히 저녁시간에 이곳을 찾는 방문객들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최근 공주 목관아터의 활용을 두고 관심 있는 주민들 간 논쟁이 뜨거웠다. 우리 공주시도 충청감영과 공주목이 있던 유서 깊은 도시이다.

내년 3월이면 의료원 건물을 철거하고, 발굴조사를 거쳐 어떻게 활용해야할지를 결정한다고 한다. 발굴조사가 끝나면 주민들의 지혜를 모아 역사·문화·관광의 도시에 걸맞게 공주목관아가 복원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본다.

공주목관아가 복원되면 목관아에서 시작하여 대통교와 감영길을 지나 공주감영으로 이어지는 옛 관청탐방코스로 또 원도심관광의 영향력 있는 볼거리로 각광을 받게 될 것이다.

소망이 이루어지고, 관광객들의 발길이 원도심에 넘쳐나는 날이 하루빨리 오기를 기대해 본다.

제주목관아 정문인 진해루 야경

 

연희각
낮에 본 관덕정 모습
관덕정의 야경
진해루와 관덕정의 야경
망경루
해설사의 설명의 경청하고있는 시의회의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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