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주 칼럼

오는 29일은 음력으로 10월 22일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500년 10월 22일 당시 영의정 한치형 등이 연산군에게 ‘홍길동이 잡혔다’는 보고를 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홍길동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부분이 10군데나 있는데, 모두 한자로 ‘洪吉同’으로 표기되어 있어, 허균이 지었다는 ‘홍길동전’의 ‘洪吉童’과는 이름 끝 자인 ‘동’자의 한자가 다르다.

그렇지만 홍길동전을 허균이 지었다는 이식(李植)의 ‘澤堂集(택당집)’ 에는 ‘홍길동전(洪吉童傳)’이라고 표기되어 있다고 하니, 연산군 6년에 잡혔다고 하는 홍길동(洪吉同)이 소설 속에 나오는 홍길동과 동명이인인지, 또는 동일인인지 혼동될 정도이다.

어쨌든 연산군 때 잡힌 홍길동이 당시 조정에서는 ‘강도’, ‘도둑’으로 불렀지만, 많은 사람들이 홍길동과 함께 명종 때의 임꺽정과 숙종 때의 장길산을 ‘조선 3대 의적(義賊)’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렇게 홍길동을 의적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아마도 부정과 부패가 심했던 옛날 탐관오리들의 재물을 약탈하여 생활이 피폐했던 선량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일 것이고, 당상관 벼슬을 가졌던 일부 관리들이 홍길동을 도왔다는 것을 보더라도 많은 추종세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현대에 와서도 ‘불사의 홍길동’이라는 노래(이주은 작사, 김성근 작?편곡, 박재홍 노래, 1962년 대도레코드사)가 나온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홍길동이 우두머리로 활동하던 활빈당의 본거지는 어디인가? 한 기록(이걸재, 공주에서 홍길동을 만나다, 허균선생. 공주의 인물 3편)에 따르면 홍길동의 활빈당은 충청도 일대에서 활동했다고 하는데, 전설에는 무성산 ‘홍길동 산성’ 아래에 있는 ‘홍길동 굴’이라고도 한다. 또 한 전설에 의하면 홍길동의 어머니가 홍길동과 그 누이를 데리고 무성산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런 연유에서인지 힘이 장사였던 홍길동 누이와 홍길동이 내기를 하였는데, 홍길동은 길들이지 않은 송아지를 끌고 한양(지금의 서울)을 갔다 오고, 그 누이는 무성산의 정상에 성을 쌓기로 해서 이기는 사람이 끝까지 더 큰 장사(壯士)로 인정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런 내기를 벌인 남매를 보는 홍길동의 어머니는 며칠 만에 성을 거의 다 쌓아가는 딸이 이기면 아들인 길동이가 낙담하여 남자답게 세상을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에 딸에게 펄펄 끓인 팥죽을 주었는데, 성곽을 거의 다 쌓고 마지막으로 남쪽 성문 지붕을 덮을 큰 바위를 지고 산을 오르던 딸은 잘 식지 않는 팥죽을 후 후 불어가면서 식혀 먹고 있는 사이에 홍길동이 도착했다는 것이다.

지금도 홍길동 굴 아래에 있는 사각진 바윗돌이 그 때 홍길동의 누이가 성문 덮개로 쓰기 위해 지고 올라가던 바위라고 해서 ‘성채바위’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 밖에도 사곡 유룡리의 홍길동 말발자국 전설, 우성 옥성리의 홍길동 누이 성문바위 전설, 유구 백교리의 홍길동 굴 전설 등 등 공주에는 홍길동에 관련된 전설이 매우 많다.

이렇게 공주와 홍길동의 인연이 만들어진 것은 바로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 균이 1607년에 공주목사(牧使)로 재임한 사실(史實)에 연유한다.

다시 말하면 서얼철폐와 만민평등 사상을 지녔던 허 균이 공주목사로 재임할 때 무성산을 활빈당 본거지로 상정한 홍길동전을 구상한 후에 강릉의 누이 집에서 소설을 완성했다고 보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도 한천리 입구에 가면 ‘홍길동 마을’이라는 표지가 눈길을 끈다. 그런데 아쉽게도 무성산에 있는 홍길동 산성은 홍길동 누이가 쌓았다는 돌을 가지고 누군가가 탑을 쌓아 놓기도 하는 등 산성이 훼손된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전남 장성은 홍길동이 태어난 곳이라고 하여 ‘홍길동테마파크’를 조성한지 오래되었고, 허 균이 태어난 강릉에서는 ‘홍길동 캐릭터 로드’, ‘홍길동전 박물관’ 등을 조성하고 있는데, 공주에서는 홍길동 산성과 홍길동 굴을 지금 이대로 둘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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