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일 (음력 7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선생의 탄신일이다.

1876년에 태어나셨으니 142년 전이다. 양력으로는 8월 29일에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서 어렵게 어린 시절을 보내고 18세에 동학에 입문하여 그 이듬해에 접주가 됐다.

21세인 1896년에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분노로 일본 육군중위를 처단한 후 해주감옥에 투옥되었다가 인천감옥으로 이송된 후에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다행스럽게도 고종임금이 판결을 보류하여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했다고 한다.

23세인 1898년 3월에 탈옥을 해서 도피하다가 그 해 늦가을에 공주 마곡사에서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으로 잠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백범 김구선생과 공주가 처음으로 인연을 맺었다.

실제로 마곡사에 가보면 보물 제802호인 대광보전(大光寶殿) 왼쪽 편에 한자로 쓰여진 ‘白凡堂’이라는 현판이 붙은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백범 김구선생께서 스님으로 기거하시던 곳이다.

지난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마곡사의 경내에 있는 백범당에는 외벽에 백범 선생과 관련된 몇 장의 사진이 게시되어 있고, 백범 김구 선생의 전신사진 형상물도 전시되어 있다.

기록에 보면 24세가 되던 봄에 마곡사를 나와 금강산으로 수행을 떠났다고 하니까, 김구 선생께서 마곡사에 계셨던 것은 1898년 가을에서 1899년 4월 이전 봄이니 길어봐야 6?7개월 정도 공주와 인연을 맺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500겁의 인연이 있어야 한번 옷깃을 스칠 수 있다고 했던가?

일평생을 우리나라의 독립만을 소원해 온 백범선생은 조국 광복 후에 마곡사를 다시 찾아 대광보전 주련의 “却來觀世間 猶如夢中事(각래관세간 유여몽중사; 물러나와 세상일을 돌아보면 마치 꿈속의 일과 같네)”를 보시고 감개무량하여 백범당의 오른편 대광보전 쪽에 향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고 하는데, 그 나무는 선생께서 가신지 69년이 지난 지금도 건강하게 서 있다.

백범 선생과 공주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이 아니다. 공산성의 동쪽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광복루(光復樓)’의 명칭을 김구선생께서 지은 것이다.광복루는 본래 조선시대에 공산성 안에 군사가 주둔할 때 있었던 중군영(中軍營)의 문루(門樓)로서 공산성 북문인 공북루(拱北樓)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일제(日帝)가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제멋대로 '웅심각(雄心閣)’이라고 불렀던 것을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다음해인 1946년 김구선생께서 공주에 들렀을 때 나라를 찾은 것을 기리고자 누각명칭을 ‘광복루’로 고쳐서 지금에 이르고 있으니 이 또한 큰 인연이 아닌가?

지난 14일에는 73주년 광복절을 하루 앞두고 이낙연 국무총리가 김정섭 공주시장과 함께 마곡사 백범당을 찾았다고 한다. 120년 전 마곡사 백범당에서 기원하고 또 기원했던 백범선생의 독립정신을 국민들과 함께 드높여 기리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국정에 바쁜 국무총리가 휴가기간에도 백범선생의 길을 따라 걷는 모습에서, 김구선생이 애송(愛誦)했었다고 하는 서산대사의 선시(禪詩)를 떠 올리게 된다.

踏雪野中去(답설야중거) 不須胡亂行(불수호난행)

今日我行跡(금일아행적) 遂作後人程(수작후인정)

“눈 덮인 길을 걸어갈 때 함부로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내가 밟고 지나가는 발자국은 뒤따라오는 사람에게 이정표가 될 것이다”

공주와의 깊은 인연이신 백범선생의 좌우명이 되었다는 이 시는 정년을 일 년여 앞두고 있는 필자에게도 지나온 인생을 깊게 성찰하게 하는 값지고, 또 값진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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