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서안

여행 준비에 잠을 설쳤음에도 불구하고 몸과 마음은 날개를 달았다. 그동안 막연하게 상상만하다가 현실로 실크로드를 만나는 기쁨은 실로 컸다.

이는 나의 타고난 모험과 탐험욕구, 열정이 남다르기 때문일 게다. 온 몸으로 퍼지는 이국의 뜨거운 공기는 진한 드림커피 한 잔이 빈속을 채우듯 짜릿한 전율로 내 몸을 감싸 안았다.

공항에서 3시간정도 버스로 서안으로 이동하는 중 비가 내렸다. 가이드는 “강수량이 적은 사막지대의 비는 로또복권과도 같다”며 기뻐했다. 빗줄기는 멈췄다, 내렸다를 반복했는데, 신기하게도 우리가 도보로 이동할 때는 비가 멈춰 우산이 없이도 여행이 가능하게 했다. 이번 여행에는 평소에 덕을 많이 쌓으신 분들이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안은 중국 산시성의 성도로, 8개 구, 5개의 현이 있으며, 인구 250만 여명이 거주하고 있다. 서안은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세운 ‘호경(鎬京)’에서 비롯되며, 그 뒤 한(漢)나라에서 당(唐)나라에 이르기까지 약 1,000여 년 동안 단속적이었으나 국도(國都)로 번영한 역사적 도시이다. 그동안 ‘영원한 평화’라는 의미에서 ‘장안(長安)’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왔으나, 1943년에 ‘서안시(市)’가 됐다.

병마용갱 –고대의 지하 도시를 지키는 진흙 전사들

점심식사 후 버스를 타고 전후 37년 동안 건축한 세계 최대 규모의 진시황릉으로 이동했다. 병마용갱은 진시황이 사후에 자신의 무덤은 지키기 위해 중국대륙을 통일 할 당시 거느린 장군과 병사, 말, 등을 섭씨 950도~1,050도 사이의 열을 가해 흙으로 빚고, 구워 테라코타를 만들어 순장한 지하무덤이다.

지하 115미터의 병마용갱에는 8,000개가 넘는 진흙병사들이 그야말로 진을 치고 있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토용土俑마다 제각기 표정이 달랐고, 실제 사람모습과 닮아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심지어는 눈썹 꼬리, 입술모양, 발톱까지도 달랐다.

병사들의 키는 1미터 80센치, 당시의 사람보다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는 감탄! 또 감탄했다. 무슨 말이 필요 하겠는가? 그저 느낌표로 “우와!”하며 감탄사로 연발 할 뿐이었다.

장이머우 감독의 영화 <영웅>(2002년)에 보면 갑옷을 입은 병사, 말, 시위를 당겨 화살을 쏘아대는 수천 명의 궁수들과 남녀주인공이 용감하게 칼을 휘두르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영화가 바로 토용들의 모습들을 재현한 것이라고 한다.

진시황의 원래 이름은 ‘잉쳉’으로 기원전 247년 열 세살에 왕에 오른다. 그는 당시의 권력자인 취부웨이의 도움을 받으며 9년 후 공식적인 지배자가 됐는데, 어머니는 감방에 수감, 그녀의 정부는 살해했으며, 취부웨이도 축출했다.

그 후 농민과 군인의 나라로 발전시키며 통일제국의 ‘왕 중의 왕’으로 선포하며 중국최초의 신성 황제가 되었다. 중국을 “차이나(CHINA)”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 때 최초의 통일제국의 이름인 “진”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민의 지배자였으며, 불멸을 추구 했던 진시황은 그리스의 스파르타, 독일의 프로이센보다 잔인하고 폭정과 폭력으로 역사상 유례가 없는 독재자였다.

중국 최초의 역사가 사마천(기원전145~85년경)이 지은 ‘사기’에 의하면 수은이 함유된 1만2천 제곱미터의 면적에 강제로 노역에 끌려온 70만 여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들 중 한명도 살아서 밖으로 나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중국에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아온다는 진시황릉, 병마용갱은 아직도 발굴이 진행되고 있다. 어둡고 칙칙한 현장에서의 끝없는 노동은 그 시대나 지금이나 무엇이 다를까 의문이 들었다. 과연 저 노동자들을 살아서 나올까? 결국 죽을 때까지 끝없는 발굴 작업만 하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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