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김정섭 공주시장

다가오는 8월 15일, 올해 광복절은 특별하다. 한반도의 평화가 가시권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올해 두 차례의 남북정상회담에 이어 9월에 평양에서 다시 회담을 한다니 좋은 성과가 기다려진다.

1주일 후면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온 겨레의 눈물을 자아낼 것이다. 73년 전 우리의 선조들은 일본의 총칼 앞에 맨몸으로 싸워 해방을 이루어냈고, 그로부터 3년 후 민주공화국을 세웠다.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남과 북은 각각의 정부를 세웠고 동족상잔과 냉전의 시대를 힘겹게 넘어왔다.

8.15 광복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의 삶은 참으로 고단했다. 일본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차례로 승리하자 우리나라는 일본의 사실상 지배하에 놓이게 되었고 쌀과 토지를 약탈당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되었고 일본화를 강요당했다. 청년들은 징병되거나 강제노동에 징용되었고 특히 여성들은 일본군 위안부로 강제 동원되어 비극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선조들은 굴하지 않고 싸웠다.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 모여 기미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중국에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우고 광복군을 조직하여 무장투쟁을 벌였다.

충청남도 도청이 있었던 공주에서도 3?1운동을 기점으로 독립을 위한 투쟁이 벌어졌다. 1919년 3.14 유구장터 만세운동, 4.1 정안과 공주 중동시장에서 각기 일어난 만세시위 등 10여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1920년대에도 공주고보와 영명학교 학생들의 동맹휴학과 비밀독서회, 농민들의 소작쟁의 등이 끊이지 않았다. 그분들의 피와 땀이 눈물이 지금 우리가 밟고 서 있는 이 땅에 배어있다.

공주시의 독립유공자는 95명이지만, 그보다 몇 배나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올해 광복 73주년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된 이은숙 선생(1889-1979, 우당 이회영의 부인)도 공주 출신이다.

올해부터 해마다 광복절이면 시민을 대표해 공주 보훈공원에 있는 독립유공자기념비에 추모의 꽃을 바치고 뜻을 기리려고 한다. 내년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순국선열과 애국지사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한 준비에도 착수했다.

식민통치 하에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은 지금까지도 고통과 아픔으로 남아있다. 민족 간 대립으로 국토를 갈라 대결하고 있으며, 일본은 국제사회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한 진실의 왜곡과 회피에 급급하고 있다. 우리가 역사인식을 바로 해야 하는 이유다.

1919년 4월 11일 제정된 임시정부의 '대한민국 임시헌장'은 제1조에서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고 명기했다.

1948년 제헌헌법 때부터 변치 않는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의 태동이다. 제3조에서는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한 대한민국”이라는 비전을 세웠다.

그로부터 99년이 흐른 지금, 저출생, 고령화, 빈부격차, 지방소멸의 위기로 인해 고달픈 국민의 삶을 직시하면, 제2의 독립운동이라도 벌여야 할 판이다.

일찍이 1898년 탈옥 중에 공주 마곡사에서 도피생활을 하고 해방 직후 다시 공주를 찾았던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를 극도로 주장하되, 그것은 저 짐승들과 같이 저마다 제 배를 채우기에 쓰는 자유가 아니요, 제 가족과 이웃,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해 쓰는 자유다. 공원의 꽃을 꺾는 자유가 아니라 공원에 꽃을 심는 자유다.” 거광복 73주년을 맞는 우리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한 마디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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