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숲 아래서/ 나태주

1
바람은 구름을 몰고
구름은 생각을 몰고
다시 생각은 대숲을 몰고
대숲 아래 내 마음은 낙엽을 몬다.

2
밤새도록 댓잎에 별빛 어리듯
그슬린 등피에는 네 얼굴이 어리고
밤 깊어 대숲에는 후둑이다 가는 밤 소나기 소리.
그리고도 간간이 사운대다 가는 밤바람 소리.

3
어제는 보고 싶다 편지 쓰고
어젯밤 꿈엔 너를 만나 쓰러져 울었다.
자고 나니 눈두덩엔 메마른 눈물자죽,
문을 여니 산골엔 실비단 안개.

4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가을,
해 지는 서녘구름만이 내 차지다.
동구 밖에 떠드는 애들의
소리만이 내 차지다.
또한 동구 밖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밤안개만이 내 차지다.

하기는 모두가 내 것만은 아닌 것도 아닌
이 가을,
저녁밥 일찍이 먹고
우물가에 산보 나온
달님만이 내 차지다.
물에 빠져 머리칼 헹구는
달님만이 내 차지다. (1970)

아무래도 나의 시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하면 「대숲 아래서」란 시를 이야기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이 시는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주고 있듯이 1971년도 신춘문예 당선시이면서 나의 시단 등단작이기 때문입니다. 심사위원은 박목월, 박남수 두 분 선생. 이 시로 하여 나는 세상에서 ‘시인’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시의 배경은 그다지 행복하지 않고 많이 쓸쓸하고 힘듭니다. 1963년도 공주사범학교를 졸업, 1년 넘게 집에서 무위도식하다가 그 이듬해인 1964년 발령을 받아 저 경기도 북쪽 연천군 군남국민학교란 곳에서 2년 조금 넘게 초등학교 선생을 하다가 1966년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육근 근무 중 1968년 주월비둘기부대 사병으로 파병되어 1년 동안 전쟁터에서 있다가 돌아와 제대, 다시 경기도 연천군 전곡국민학교란 곳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한 여교사에 연정을 느끼고 심하게 기울었다가 그만 실연의 고배를 호되게 마셨습니다. 몸에 병까지 생겨 더 이상 객지에 저대로 두었다가는 안 되겠다 싶어 아버지가 노력하여 고향의 시골학교로 전근하게 되었습니다. 새로 찾아간 학교는 매우 낯설고 썰렁한 학교. 두고온 경기도의 학교와 동료들이 몹시 그립고 나에게 실연의 슬픔을 준 그 여교사조차 많이 보고 싶었습니다.

사람은 그렇게 한 때 어리석은 시절이 있고 미친 청춘도 있는 법인가 봅니다. 실연으로 인한 상실감과 패배의식이 이런 시를 낳게 하였다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참 그건 또 한 고비 모를 일이기도 합니다. 이제와서 나는 나에게 실연의 아픔을 준 그 여교사에게 감사한 마음을 느낍니다. 당신이 아니었고 당신이 나에게 그리 하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시인 같은 것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열다섯 살에 감염된 시의 바이러스는 그렇게 해서 치유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내 나이 스물여섯. 결코 늦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대학교에 다녀 보지도 못하고 변변한 문학동인회 활동같은 과정도 거쳐보지 못하고 그저 깡촌을 전전하면서 초등학교 교사로만 일관한 청년에겐 과분한 영광이 아닐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뒷날 나는 이런 시를 한 편 더 쓰기도 했습니다.

한 여자로부터
버림받는 순간
나는 시인이 되었고

한 여자로부터
용납되는 순간
나는 남편이 되었다.
― 나태주, 「두 여자」전문

 

1971.01.12,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상식장(사진 왼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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