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자의 동작치유 스무 번째 이야기

양력 6월 말, 음력 5월 13일 쯤 능소화가 곱게 핀 이 계절에 나는 갑사를 향했다.

‘갑사 마방길’은 새로운 도로명으로, 계룡 초등학교 삼거리 쪽을 향한 도로명이다. 난 이 이름이 재미있어 항상 그곳을 지날 때면 사소한 풍경을 읽는, 그것도 연출과 각색까지도 해보는 일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사극을 통해 알게 된 마방길은 옛날사람들이 말을 갈아타거나, 빌려주는 곳이다. 그것도 관아에 직급이 있는 벼슬아치들만이 가능한 그런 길이기에 나는 항상 그곳에서 스스로 시나리오를 썼다.

나의 꿀렁 꿀렁거리는 차 안에서 잠시 아주 짧은 생각들이 스쳐지나갔다. 길가 옆 그늘진 나무아래 삐까 뻔쩍한 차 앞에 있는 건장한 남자 서너 명이 눈에 들어왔다.

차주로 보이는 사람은 열심히 자신의 새 차에 대해 설명하는 듯 했고, 팔짱을 낀 다른 한 사람은 뭔지 썩 기뻐하는 느낌이 아닌 듯 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그냥 구색을 맞추기 위해 서있는 듯 했다. 그렇게 나의 머릿속에는 많은 그림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새신을 신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의 삶은 결코 짧은 여정이 아니건만 새것 앞에서 집착과 욕심을 내는 것이 사람인지라, 새것에 대해서는 누구나 욕심과 설렘이 있는 법이다.

나는 오늘 오랫동안 나와 함께한 친숙하고 익숙해진 내 차와 편안해진 내 신발 앞에 문득 지나온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며 말을 한다. “고맙다”고

정리정돈이란 버리면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건을 버리는 데는 과감했지만, 나의 집착과 나의 욕구는 왜 그리도 버리지 못하고 가슴속에 담고 있는 것인지.

무엇을 어떻게 버려야 하는지 조차도 모르면서 “비운다. 내려놓는다. 끊는다. 버린다” 라고 매일 학습하듯 중얼거린다.

뒤꼍에 올망졸망 많은 것을 매달고, 걸어놓고, 새워놓았던 농기구들을 정리해 놓은 모습과 함께 선친이 떠올랐다.

내가 쓰는 물건이 아니었기에 분주한 선친의 모습이 무척 답답해 보였다. 그 농기구들을 그렇게 애지중지 정리해 놓아야 되는 것인지, 왜 저리도 그렇게 불필요한 것을 두시는지 답답해했었다.

그런데 장마 전 뜰과 주변을 정리정돈을 하다 보니 무엇인가를 하려 찾던 도구들과의 씨름에 한 두 시간을 그냥 보낸 적이 예사였다. 어디에다, 무엇을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아주 작은 것도 꼭 필요한 것인데, 막상 찾으려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겪으면서 그때의 선친의 모습이 이해가 됐다.

찾다가 찾다가 지쳐 잠깐 목을 축이며 그늘에 앉아 시원한물을 마시며 내가 웃고 있다. 이제야 그 맹물이 소울 푸드가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맹물이, 시원한 이 맹물이….

아마도 나는 오래된 여정 속에서 거의 종착역을 바라다본 나의 꿀렁 꿀렁거리는 차와 편안해진 나의 낡은 신발을 바라보며, 마방길에서 나의 의식을 잠시 들여다 본 것 같다.

이것이 동작치유의 스무 번째 이야기이다.

해보기 : 나의 신발을 바라본다.

내가 어떻게 걸었는지 사물을 인식하기 위한 의식으로 자기 발아래 있는 신발을 바로서서 바라본다.

아주 편안하게, 가슴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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