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 여행은 느릿느릿 진행된다. 바쁠 것이 없다. 가이드를 쫄랑쫄랑 따라 다니면서 설명을 듣고, 쇼핑도 하고, 노닐다가 때가 되면 식사하러 간다.저녁을 먹고 호텔에 도착한 시간이 오후 6시. 다른 외국 여행지에서 이 시간에 호텔에 도착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마도의 시원한 바닷바람을 실컷 쏘이고, 저녁을 먹고 나서 방 열쇠를 받아 입실했다.역시나 그랬다. 일본의 호텔은 나를 기대(?)를 결코 배신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행히도 운이 좋아 대마도의 특급호텔에서 묵었는데도 그랬다. 좁아터진 객실. 한국의 여관 정도의 수준에도 못 미치는 느낌이다.외국에 나갈 때면 늘 노트북을 휴대한다. 현지 호텔에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요즈음은 대부분의 호텔에서 와이파이나, 인터넷서비스를 제공하지만, 호텔에
쓰시마섬의 자연쓰시마는 산림이 면적의 89%를 차지하는 자연이 풍부한 섬이다. 이즈하라읍의 다테라산과 미쓰시마읍의 시라다케에 남아있는 원시림은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섬의 지형은 표고 200m~300m의 산들이 해안까지 이어져 있으며, 장소에 따라서는 높이 100m의 단층절벽도 있어 웅대한 자연을 볼 수 있다.쓰시마 중앙부의 아소만은 쓰시마의 대표적인 풍경 중 하나이다. 크고 작은 여러 곶과 섬들이 복잡하게 얽힌 리아스식 해안으로 이키쓰시마 국정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쓰시마의 풍부한 자연에는 국가천연기념물인 쓰시마 야생고양이를 시작하여 쓰시마에서만 볼 수 있는 생물과 한반도 등의 대륙계 동식물이 많이 생식하고 있다. 또한 철새의 중계지이기도 하여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야생조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일본과의 교류가 빈번했다. ‘통신사’는 일본에 파견된 사신에게 붙은 명칭으로, ‘조선통신사’는 일본의 입장에서 붙인 이름이다.임진왜란 이전의 통신사는 주로 왜구의 단속 요청, 대장경의 증정 등을 주 임무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 막부의 새 쇼군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한 목적으로 파견됐다.그러나 조선은 세종 이후 파견되던 일본과의 사절 왕래를 1510년 (중종 5년) 삼포왜란이 발생하자 중단했고, 선조 때인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요청으로 다시 교토로 파견하게 된다.1590년 3월 6일 출발한 당시 통신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 침공을 탐지할 목적으로 위해 파견된 중요한 특사였으며, 서인의 대표인 정사 황윤길, 동인의 대표인 부사 김성일, 동인이었던 허성을 서장관으로, 정
수선사에 도착해 면암 최익현 선생의 순국비를 찾았다. 면암 최익현 선생은 1833년에 경기도 포천에서 출생, 14세 때부터 이항로 문하에서 수학했다.그리고 1855년 (조선 철종 6년) 명경과에 급제하여 고종임금 시절인 1868년 9월 사헌부장령으로 있을 때 당대의 권력가인 대원군의 주요 정책인 경복궁 중건의 중지, 취렴정책의 혁파, 당백전의 폐지, 사대문 문세의 폐지를 요구하는 상소를 올리고 관직이 삭탈됐다.1876년 1월 일본과의 통상조약인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지니고 궁궐 앞에 엎드려 일본과의 강화는 일본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화의를 상소를 올렸다가 흑산도에 유배됐다.1905년 10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11월 29일 ‘청토오적소’ 를 올려 조약의 무효를 국내외에 선포하
다음날인 14일 아침 부산국제여객선터미널 내 식당에서 아침을 먹었다. 오전 9시 10분 출발인 대아고속해운의 오션플라워호를 타기 위해서는 7시 40분까지 집결해야 한다. 그러니 7시부터 영업을 하는 이 식당이 고맙기만 하다. 입국절차를 마치고 면세점을 구경한 뒤 오션플라워호에 올랐다. 부산항에서 대마도 이즈하라항까지는 2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된다.배에는 지정좌석이 있는데, 좌석의 뒤에 붙어 있는 번호가 자기에게 배정된 좌석이다. 배에는 매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작은 면세점이 있는데, 이곳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술과 담배를 살 수 있다.2시간 10분을 바다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대마도 이즈하라항에 도착했다. 시골의 조그마한 항구분위기가 난다. 입
쓰시마 섬은 쉽게 나를 자기의 보금자리에 안착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지난 9월 7일 대마도에 가기 위해 하루 전인 6일 오후 KTX를 타고 부산역에 도착했다. 어디에서 묵을까 하고 숙소를 찾고 있었는데, 여행사에서 전화가 왔다. “파도가 높아 내일 출항이 취소됐습니다.”공주에서 부산까지 아침부터 부산을 떨며 왔는데…….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못내 아쉬워서 “혹시, 출항취소가 번복되는 경우는 없나요?”하고 물었더니, “하루 앞두고 취소하면 번복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그냥 돌아오는 수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아니, 있었다. 부산역에 있는 부산 어묵집에서 동행한 아내와 어묵을 한 개씩 사먹는 일이었다. 부산어묵을 하나씩 사먹고 우리는 공주로 다시 발길을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작품인 일리아스 (Ilias)는 그리스 최고, 최대의 민족 대서사시이다. 일리아스는 1만 5,693행, 24권으로, 각권마다 그리스 문자의 24 알파벳순(順)으로 이름이 붙어 있다.《일리아스》는 도시 트로이의 별명 ‘일리오스(Ilios)’에서 유래한 것으로, ‘일리오스 이야기’라는 뜻이며, 10년간에 걸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격 중 마지막 해에 일어난 사건들을 노래한 서사시이다.이 10년간의 전쟁이 일어난 배경은 여신들의 질투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여자들에게 돌을 맞을 지도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여자라는 이상한(?) 족속들은 항상 문제를 일으킬 소지를 안고 있다.그리스의 신들은 신(神)답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다웠다. 질투도, 싸움질도 해댄다. 하지만 그런 신(
에페스를 둘러 본 우리는 그리이스인 마을인 쉬린제 마을로 향했다. 쉬린제 마을은 셀축으로 부터 9km떨어진 오스만스타일의 시골마을이다.쉬린제 마을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올라가야 했다. 쉬린제 마을은 이 때문에 날씨가 나쁠 경우 생략되기도 하는 코스이다. 이 마을로 가는 내내 양쪽 길가로 올리브나무 농장이 펼쳐져 있었다. 올리브 나무 농장은 우리나라 시골에 있는 사과나무 과수원처럼 비탈길에 위치해 있어 풍경만으로 본다면 우리네 시골마을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쉬린제 마을의 시작은 에페스에 기독교 인구가 가장 많던 14세기부터였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그래서 인지 이곳에는 두 개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마을 입
사람은 누구나 시간이 지나면 후회스러운 일이 생긴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 이번 중국 여행에서도 후회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다.그 가운데서도 가장 후회스런 일은 내가 평소 좋아했던 중국 시인 왕유(王維)의 상을 보고서도 몰라보고 그 앞에 새겨진 시를 읽어보지 못한 일이다.이는 나의 부주의 탓이고 사려 깊지 못함의 탓이고 더 나아가 무식의 탓이다. 양관(陽關)이란 곳, 중국 한나라 때부터 서역으로 통하는 관문이었던 곳. 거기서부터 정말로 실크로드의 출발이고, 험난한 사막 길, 천산북로 천산남로가 열리는 카라반 루트의 시작점이다.여행 일정의 마지막 부분에 그 양관이란 곳을 우리 일행도 가 보았다. 더 없이 스산하고 황막한 풍경이 정말로 인간이 사는 마을의 끝 지점에 비로소 우리가 왔구나 싶은 실감이
최근 내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 가운데 ‘버킷리스트’란 말이 있다. ‘죽기 전에 해보고 싶은 일들의 목록’ 정도가 그 말의 뜻일 것이다.생각해보면 하루하루의 삶 자체가 버킷리스트나 마찬가지다. 성한 두 다리로 걸어 다니며, 내가 하고 싶은 이런저런 일들을 하며,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 자체가 버킷리스트의 연속이겠다.그 가운데 내가 글을 쓰고 책을 내고 더러는 그림을 그리는 일도 버킷리스트가 되리라.그러나 나에게 특별한 버킷리스트 하나가 있었다. 그것은 사막에 가보는 일이다.이미 미국 여행길에 모하비사막을 여러 차례 건너보았고, 데스밸리에도 가서 사막 가운데에서 1박 하면서 별빛도 보고 오아시스도 살피고 모래바람도 만끽한 바 있다. 그러나 나는 아시아 쪽의 사막을 보고
우리는 토쿠사역을 견학했다, 석탄을 때서 달리는 열차를 복원 관광을 하는데 한 달 전부터 예약을 하지 않으면 탈 수가 없을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며, 지나는 기차를 구경하는데도 돈을 받는다고 했다, 나는 그 기차를 꼭 한번 타보고 싶었다. “빼엑빼엑” 기적소리를 들으며 느릿느릿 달리는 기차 안에서 풍경을 구경하고 싶었다. 부럽다, 저렇게 연기를 내품는 화차가 아직도 있다니…. 츠와노라는 작은 마을에서 산책을 하고 작은 수로에서 자라는 잉어를 보면서 ‘자랑’이 아닌, ‘고문’으로 보였다, 일본의 어디를 가든 만날 수 있는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으며 나는 마을을 살리고자 하는 주민들의 노력들에 감탄했다. 작고 앙증맞은 예쁜 화분들
6월 5일 4시30분 출발을 5시30분으로 착각했다. 덕분에 세수도 못하고, 허겁지겁 출발했다. 이날 인천공항은 땅이 젖지 않을 만큼 비가 내렸다.일본에 도착하니 꽤 많은 비가 내려 활동하기가 약간 불편했다. 다행히 호텔에 짐부터 풀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더라면 와타나베 야마구치시장을 만날 때 씻지도 못하고 만날 뻔 했다. 시청으로 가기 전 루리코치 오층탑(국보)을 보러갔다. 빗속의 목탑은 신비롭기까지 했다. 아마도 화사한 빛 속이었으면 그다지 신비해보이지는 않았으리라.? 오에이의 난에서 죽음을 맞이한 무장 오우치 요시히로는 “나는 백제왕족”이라고 호기롭게 말하던 무사였다고 한다.1404년에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해 그의 동생 모리미가 이 오층
아치노사카가와에 개천에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란스럽지 않게 느릿느릿 날아다니는 반딧불이처럼 사람들이 모여들었다.이 나라 사람들의 국민성이 그래서 일까? 가게마다 작은 쪽지가 붙어 있고, 사람들도 시끄럽지 않다. 조용히 둑에 앉아 있거나, 혹은 서서 반딧불을 감상하고 있었다.통역하는 분께 창마다 붙어 있는 쪽지에 대해 물었더니 “반딧불 감상을 위해 소등을 하고, 장사를 하지 않습니다”라는 내용을 쪽지를 붙인 것“이라는 설명이었다.반딧불이 축제는‘ 시끄럽고, 요란한축제가 아니라, 반딧불이를 위한 작은 잔치였다. 눈을 돌려 냇가의 숲을 보니 반딧불이 정말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이튿날 나는 우리를 인솔한 공주시 정하나씨에게 아치노사카가와로 다시 한 번 가
터키의 ‘에페스’는 ‘지명(地名)’보다 ‘지역(地域)’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는 성경덕분인데, 성경에 나오는 ‘에베소’지역이 바로 ‘에페스’이다.카파도키아 지역에는 팽이버섯 모양의 봉우리들, 괴암괴석이 떼를 지어 몰려있다. 따라서 열기구를 타면 이러한 신비로운 모습을 맘껏 감상할 수 있다.그런데, 고대유적의 진수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에페스이다. 터키에는 곳곳에 유적이 분포하고 있지만, 에페스에는 터키의 고대 유적이 집중돼 있다.에페스의 역사는 기원전 5,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에페스 박물관에는 선사시대인 기원전 5,000년 전의 것으로 알려진 돌도끼, 돌로 만든 창, 구운 토기 등이 전시돼 있다.에페스 지역은 당초 해안이었지만, 수세기동안 카이스터강으로 흘러들어온
우리는 우리의 주변 환경에 너무도 익숙해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익숙해진 것만을 당연시하고, 익숙해 있지 않은 것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한다. 심지어 이러한 이상한 것에 대해 비난하고, 터부시하는 경우까지 있다. 과연 그럴까?여행은 이처럼 우리에게서 익숙해진 것들과 멀어지는 작업이다. 이러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이야 말로 여행의 이유이며, 묘미이다.한국에서는 예년보다 일찍 찾아온 더위로 헉헉댈 때, 메르스로 신문들이 도배가 돼 있을 때 난 북유럽을 향했다.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4개국을 7일부터 14일까지 6박 8일 동안 여행하는 랜드사의 팸 투어에 참가한 것.물론 비용이야 들겠지만, 아깝지 않은 투자라는 판단이 들어서 연락을 받자마자 바로 여행참가를 결정했다. 그리고 여행기간동안 예정돼
창간 9주년을 맞아 특급뉴스 여행사업부가 추진했던 7월 9일 (목) 16일(화) 까지 7박 8일의 실크로드 역사탐방 신청접수를 마감합니다.이번 실크로드 역사탐방에서는 중국 3000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섬서역사박물관’과 당나라 때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과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지어진 64.5M 7층 「대안탑 북광장」, 「종고루광장」, 「회족거리야시장」, 「병마용갱」, 「진시황릉」, 「화청지」를 답사하게 됩니다.그리고 양가죽배를 타고 「음마대협곡」, 「황하석림」, 「뢰대한묘」를 보고, 장액에서 「대불사」와 「칠채산」을 구경하게 됩니다.또한 「가욕관 성채」 와「장성박물관」을 둘러 본 뒤 「명사산」, 「월아천」, 「양관고성」을 살펴본 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발견됐고, 불교 예술의 정수를 볼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그리스어: ?ερ?πολι?)는 기원전 190년에 로마인들에게 점령돼 새로운 통치자들 아래에서 번영했던 도시로, 유적과 유적에 얽힌 사연들이 곳곳에 덩그러니 누워있다.이곳은 아나톨리아 인, 마케도니아 인, 로마 인, 유대인들이 뒤섞여 지내는 ‘국제 도시’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 온천으로 와서 물을 가져가 양모를 씻고, 염색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했으며, 물을 이용한 치료법이 발달하기도 했다. 유해한 증기가 발생하는 단층 위에는 아폴로 신전이 세워져 있다. 세베루스(Severus) 시대에 만들어진 극장은 에페소스(Ephesos)의 아르테미스(Artemis)에게 바치는 의식과 희생 제물을 묘사한 멋진 프리즈(frieze)로 장식되어 있다.대
데린쿠유 관광을 마친 우리는 카파도키아로 향했다. ‘카파도키아’는 네브셰히르, 카이세리, 니데를 잇는 삼각지대를 말한다.정작 지금의 지도에는 카파도키아가 없는데, 이는 기원전 27년부터 기원전 64년까지 존재했던 카파도키아 왕국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카파도키아는 버섯 모양의 기암괴석이 천지때깔로 박혀있다. 카파도키아는 6,000만 년 전 에르지예스산과 하산 산의 화산활동으로 인해 분출된 화산재가 응회암으로 굳어졌고, 이 암석이 풍화작용으로 인해 원추형으로 변하면서 각양각색의 모양으로 늘어서 관광객들의 발길을 붙잡고 있다. 카파도키아 여행의 백미는 열기구 체험. 가이드가 바빠진다. 바람이 세게 불거나, 기상조건이 좋지 않을 경
대만여행 이틀째. 우리는 아침식사를 마친 뒤 열차를 타고 화련으로 이동했다.현지 가이드는 “화련으로 가는 열차표를 구하기가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며 일행들이 서로 다른 객실에 배정된 것을 미안해했다. 그리고 현지인에게 양해를 구해 자리를 바꿔 같은 객실에서 여행할 수 있도록 최대한 배려했다. 낯선 땅에서 우리가 사실상 기댈 수 있는 것은 결국 가이드다.가이드와 함께 2시간여 동안 열차를 타고 오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여러 사람, 다양한 삶의 편린들을 만나보는 것 또한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며, 기차여행의 낭만이다. 기차여행을 하면서 창밖을 보니 우리나라의 70년대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가이드에 따르면 대만은 세금을 많이 걷지 않
아침이 되어서야 우리는 ‘데린쿠유’에 도착했다. ‘데린쿠유’는 ‘깊은 우물’이라는 의미로 터키 중부 네브셰히르 주의 주도 네브셰히르에 있는 지하도시이다. 이곳은 ‘카파도키아’라는 고대 지명으로도 불리는데, 이스탄불에서 약 730km 떨어진 아나톨리아 고원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다.카파도키아 지역에는 많은 지하도시가 존재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큰 지하도시가 데린쿠유이다. 데린쿠유는 1963년 우연히 발견됐다.닭이 자꾸 사라지는 것을 의심한 농부가 닭의 다리에 끈을 메달아 놓았는데, 그 닭이 데린쿠유에 빠졌고, 그 바람에 데린쿠유가 발견됐다고 한다.데린쿠유는 지하 8층에 깊이는 55m이르고, 2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한다. 내부에는 가축우리, 부엌, 곡식창고,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