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7년(인조 25) 신유가 공주의 명승 가운데 10곳을 골라서 지은 「후공주십경시」는 작자의 문집인 『죽당집(竹堂集)』에 전한니다.신유가 38세 때 공산현감으로 부임하였는데, 이때 10곳을 택하여 시를 지었으며, 후십경시(後十景詩)라 한 것은 150여 년 전에 서거정이 지은「공주십경시」가 있기에 이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라 합니다.이 시는 모두 10수로서 그 제목은 ① 동월명대(東月明臺) ② 서월명대(西月明臺) ③ 정지사(艇止寺) ④ 주미사(舟尾寺) ⑤ 영은사(靈隱寺) ⑥ 봉황산(鳳凰山) ⑦ 공북루(拱北樓) ⑧ 안무정(按舞亭) ⑨ 금강진(錦江津) ⑩ 웅진도(熊津渡)입니다.이중 서거정의 작품과 비교하여 대상이 동일한 것을 찾아보면 ③ ‘정지사’만이 「공주십경시」의 ‘서사심승’과 겹치고, 나
첫번째 사진은 익산 미륵사지 발굴 현장에서 나온 석등의 하대석입니다.그런데 사진 상으로 하대석 좌측으로 용도를 알기 어려운 석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두 번째 사진에도 나와 있습니다.두 번 째 사진은 공주시 탄천면 정치리 탑곡리 사지에 마지막 하나 남아있는 석물로 두개의 석물 용도가 아마도 같은 것이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제일 아래 사진은 공주시 주미동에 있는 석등 하대석 사진인데 위에서 아래를 보고 찍었기에 모양에 입체감이 덜나지만, 복련(연꽃을 엎어놓은 상태) 형태로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등 하대석의 모양과 별반 다를 게 없습니다.정치리 석물은 디지털 공주문화대전에 들어가 보면 석불의 하단 부위로 석불을 세워 모시던 대석으로 소개되고 있고, 불상편이 남아있는 것으로 나와 있는데, 그것은
초나라 위왕이 장자를 흠모하여 사신을 보내면서 재물을 올리고, 초나라 재상으로 모시겠다 하였답니다.만약 누군가 그런 경우라면 자리를 차고 일어나 사신을 맞이하며 “성은이 망극하여지이다” 하고 극구 배례할 것 인데, 장자의 경우는 이와 정반대의 반응으로 찾아간 사신을 무색하게 하였다 합니다.장자는 사신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가져온 천금은 큰돈이고, 내 평생에 만져보기도 힘든 돈인 줄 압니다. 또 그대의 왕이 내게 제안한 재상이라는 자리 역시 평생에 단한번의 기회를 얻기가 어려운 높은 벼슬입니다.그렇지만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당신도 잘 알겠지만 나라에 큰 제사에 쓰이는 흰 소가 있어서 몇 년을 호강에 겨워 살게 하면서 심지어 다른 소와는 달리 무늬 옷을 해 입히기도 합니다.그렇게 가꾸고 길러진
27일에는 가칭 ‘대통사지 복원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스님과 불자들이 같이 공주시장실을 방문했습니다.그동안 대통사지와 관련해 만든 문건을 전달하고, 불교계나 고도 공주를 사랑하는 시민들이 우려하는 대통사지의 보존과 발굴, 그리고 훼손 염려를 전달하고, 공주시 반죽동에 위치한 대통사지 주변을 발굴해 명품도시 고도 공주로 만들고자 노력하는 시장님으로부터 성의 있는 답변을 들었습니다.시장님은 “대통사지로 추정되는 부근에서 대통사지 관련한 유물 한 점 만이라도 나오면 원이 없겠다”며 대통사지를 찾아내고자 몇 군데 발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별무소득이었음을 말했습니다.그리고 “지금의 노인복지관 신축은 3년 전에 유림으로부터 대지를 매입, 부지 선정이 결정된 사안으로 지금으로써는 시장이 공사재고, 혹은 유보
서론공주는 백제의 고도로써 오랜 역사적인 유적이 많은 곳입니다. 그중에는 백제시대 불교유적으로 보이는 절과 사지 탑과 당간 등이 많은데, 그중에 공주시 반죽동 302-2번지에는 1963년 1월 21일에 국가에서 보물로 지정된 대통사지 당간지주가 남아있습니다.대체적으로 이 당간지주를 중심으로 하는 곳이 대통사지였을 것이라는 판단아래 나라에서는 주변 약 1000여 평에 달하는 지역을 공원형태로 만들어 두고, 시민들의 휴식처로 사용하면서, 역사유적을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대통사’라는 이름은 일설에 의하면 양나라 무제의 연호가 ‘대통’이었으므로 국력의 신장을 위하여 노력하던 성왕 시대에 양나라와의 교류 등을 촉진하면서 양무제의 이름을 절 이름으로 사용했다고도 전합니다.반면에 우리 불교
부처님에게는 열 분의 뛰어난 제자가 있었는데 그분들을 가리켜서 ‘상수제자’라 말합니다. 수제자 가운데 뛰어나다는 말일 것입니다.두타 행을 제일 잘 행하신 분으로는 ‘가섭존자’이고, 많이 들어 알고 기억하는 이는 ‘아난존자’이며, 공의 도리를 잘 이해한 분은 ‘수보리존자’입니다.또 지혜가 뛰어나기로는 ‘사리불’이라는 제자이며, 신통이 뛰어나기로는 사리불의 벗 ‘목련존자’이고, 옳고 그름을 논의하는 데는 ‘가전연존자’가 으뜸, 설법을 잘 하기로는 ‘부루나 존자’가입니다.하늘을 보는 눈이 열려 천안제일이 된 ‘아나율존자’와 은밀하게 도행과 보살행을 잘하기로는 ‘라후라존자’이고, 계를 잘 지켜서 지계제일로 알려진 ‘우바리존자’등 열 분의 제자들은 누가 더 잘 한다 못 한다를 떠나서 부처님 재세 시에 수행
그림 속에는 대통사지 당간과 탑지 금당지 수조 강당 경찰 국민학교 고녀 입구 공주교 등이 나옵니다.? 대통이라는 기와편이 출토되었다는 내용? 대통사지 찰간(찰간이란 당간지주를 말함)?지금 보여드리는 사진 석장은 공주시 반죽동에 있는 대통사지와 관련한 일제시대 가루베지온 공주고등학교 교사로 백제역사에 관심을 갖고, 송산리 6호 고분을 발굴해 낸 사람)이 지은 책에 나오는 것입니다.중학동에 계시는 윤여헌 교수님께서 빌려주신 책에서 복사를 했고, 서정국 교장선생님께서 일본어를 아시는 분께 부탁하여 번역까지 해주셨기에 대통사지와 관련한 부분만 발췌하여 게재합니다.新羅の黃龍寺の配置が金堂と塔との?係などから見て、いはゆる百濟?式の伽藍配置であつたと考へられ、
공주고등학교 3회 즉 1929년 졸업앨범에는 교사들 사진이 있습니다. 그중에 우리 공주에 와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틈나는 대로 백제의 유적을 답사하고, 발굴(도굴)하면서 송산리 6호분을 발굴하고, 안에 있던 부장품들을 모두 빼돌려 놓고 일본이 패망을 하자 은밀한 루트를 거쳐서 일본으로 가져갔을 가능성이 높은 그런 가루베지온(경부자은)의 젊은 시절의 사진이 보입니다.일전에 이화영 교수님의 회고담을 들어보니 가루베지온은 수업이 없는 때에는 손에 지팡이 같은 것을 들고 공주 시가지 주변을 돌아다니며 땅을 쿵쿵 두드려보았다 합니다.그렇게 해서 속이 비었다 싶은 곳은 몰래 도굴을 하였고, 송산리 고분은 물론 수백, 수천 기에 달하는 백제의 석실고분들을 파헤쳐서 안에 있는 부장품들을 도굴해내는데 제일 앞장을 선
신라시대 어느 젊은이가 비단을 짊어지고 이 마을 저 마을 팔러 다니다가 산 고개를 넘는데 고개 말랭이에 노스님 한분이 앉아 계십니다.“나도 조금 쉬어가자” 하고 자리에 앉아서 보니 그저 쉬시는 것이 아닌 듯싶습니다.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앉아계시던 스님이 자리를 일어나려고 할 때 젊은이가 궁금하여 묻습니다.“스님께서는 오랜 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계시던데 혹시 다른 사람이 모르는 무슨 공부를 하셨습니까?”그러자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허허 젊은이가 무얼 그리 자세히 보았는가? 나는 그저 무슨 특별한 공부를 하였다기보다 내옷 속에 사는 이들이 피를 빨아먹을 시간이 되었기에 그 녀석들을 위해서 잠시 앉아 있었던 것 뿐 이라네”라고 대답하십니다.젊은이의 마음에는 저런 분을 요즘 말로 도인이라고 하는
대통사지 당간지주 가까이서 고가 3미터 30, 폭이 1미터 80이 되는 석불이 발견되어 군청으로 옮겼다는 기사가 매일신보 1930년 7월 28일자에 있습니다.이와 관련해 몇몇 분들과 대화를 나눠보니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라며 그런 사실이 있으면 석불 발견 자리에 복지관을 짓고 있는 일은 바로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출가한 사문으로써 이러한 일에 너무 지나치게 관여하는 것 아니냐하는 생각을 가지신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그러나 대강의 전후 사정은 이러합니다. 지난해 ‘고도육성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공주시가 주관하고, 공주대학이 중심이 되는 역사와 관련한 공부를 하였던 적이 있습니다.이 강좌는 앞으로 공주가 백제의 고도요, 조선의 감영이 있던 문화유산을 잘 살려서 공주를 과거의 역사문
우리 부처님께서는 성인 중에 성인이라 불리시는데 유가의 성인인 공자님도 4대성인중에 한분으로 모두의 추앙을 받으실만한 분입니다.공자님에 대한 이야기는 많지만, 오늘은 공자님이 행하신 일 가운데 한가지를 이야기하려 합니다.공자님이 어느 마을에 이르니 당산나무아래 작은 당집에서 여인 하나가 구슬프게 울고 있습니다.딱한 생각이 들어서 “왜 그러느냐?”물으니, “이 당산나무에 사는 지네귀신이 있어서 매년 어린아이 하나를 바쳐야 마을에 해가 없이 넘어가는데 이번에는 자기 아들이 당번”이라 합니다.공자님은 측은지심이 들고 그런 해물이라면 위하여서 되겠는가 싶어서 그날 밤에 당집에 홀로 앉아서 지네가 나타나기를 기다립니다.밤이 깊어서 지네가 제물을 먹기 위해 나타나자 공자님은 당신의 대유정력을 이용하여
"백제시대의 석불소상공주군청 구내에 보존충남 공주 제민천 제방(고녀교전高女校前)에 위치하여 있는 불상을 지난 25일 공주군청 구내로 옮겨 보존케 하고 공주 서혈사에 있는 석불을 동처로 옮겨 보존케 하고 일반의 고고학 자료로 열람케 한다는데 제민천 제방에 있는 불상(고가 1장 1척 폭이 6척)은 지금부터 약 1500년전 백제시대에 조성한 것인데 동처에 매몰되어 있는 것을 당지 김갑순씨가 건립하여 금일까지 보존하여 오던 것이라는데 씨의 승락을 얻어서 옮기게 된 것이라 한다매일신보 1930.07.28" 19일과 20일 양일간 공주 향토문화회와, 고도보존을 위한 세미나 등에서 “대통사지 법당 터로 추정하였던 곳에서 석불이 발견되었던 기사가 있는데 어찌 비어있던 자리에
여자 이름으로 만덕이라고 하면 우선 제주사람으로 선행을 많이 하여 조정에서 크게 상을 받은 인물이 생각납니다.오늘 ‘되는 집안은 가지나무에 수박 열린다’라는 책을 잠시 보다보니 공주사람 만덕이 이야기가 있어서 적어봅니다.이름 그대로 만가지 덕이 있어야 할 만덕이는 양반집의 딸이었으나, 집안이 너무 가난하였으므로 그 아버지가 딸을 팔아서 부잣집 노비가 됩니다.만덕이는 일을 시키면 군말 없이 해내니 주인집에서는 더할 나위없는 일꾼이 되었으나, 한 가지 흠이 있다면 인물이 곰보박색인지라 아무도 여자로써 상대해주지를 않습니다.어느 날 주인집 명으로 고사리를 따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비를 만나 큰 동굴에 몸을 피했는데 잠시 후에 소금장수 하나도 비를 피해 굴에 들어옵니다.이래서 남여상열지사가 있게
모처에서 시행하는 역사 강좌에 갔다가 자료 사진으로 올려 진 공주 대통사지 추정 터를 보니 금당(법당, 대웅전) 자리로 표시된 부분이 공주시에서 발주한 대형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곳입니다.전반적인 문화재 발굴 조사를 거치고 공사를 하고 있는지는 몰라도 국가 보물로 지정된 대통사지 당간지주에서 5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다가 대형공사를 하고 있는데 그곳이 금당터라는 얘기입니다.대통사지에 대한 조사와 발굴은 근대에도 시행이 되었다고는 하는데 사지를 발굴해 내는 데는 실패했고, 대략 공주사대부고 앞으로 나있는 길의 북쪽 즉 구 공주경찰서 방면이 아닐까하는 추측이 있다고 합니다.이날 본 도면은 일제 시대 공주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가루베 지온이라는 일본인이 박물관으로 옮긴 대형 석조가 발견된 지점과 당간
부처님의 전생을 기록한 경전을 읽다보면 일반인으로는 정말로 상상도 하기 어려운 보시의 공덕을 끊임없이 쌓아 오셨던 모습에 수행이 적은 불제자로서 눈물이 날정도입니다.어느 때인가 부처님은 ‘살타태자’라는 이름으로 여러 형제왕자들과 부왕을 모시고 여행을 합니다.그런데 살타태자는 바로 위에 왕자와 함께 일행과는 조금 뒤쳐져서 놀며 가고 있을 때 머지않은 곳으로부터 신음소리를 듣게 됩니다.호기심이 발동한 두 왕자가 현장을 가보니 거기에는 이제 막 해산을 한 듯한 어미 호랑이가 너무나 탈진해 기진맥진한 채로 사경을 헤매고 있고, 갓 낳은 아기 호랑이는 어미의 보호를 받지 못해 역시나 잘못하다가는 죽음을 당할 처지에 있습니다.두 왕자는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하는 측은지심으로 잠시 살펴보다가 도움을 줄
울림고등부 법회를 하면서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대심문관을 주제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그리스도 교회의 최고의 권위를 가진 사제가 구름같이 모여든 신자들을 향해 강론을 하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사제의 입과 말에 귀를 기울이며 한마음이 되어가고 있는 순간에 신자들의 면면을 살피던 사제의 눈에 색다른 사람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행색은 보통 사람에 지나지 않지만, 무언가 멀리서부터 보여지는 눈빛이 자기가 늘 기도하고, 묵상하며, 다시 오시기를 기도하던 그분의 모습이 연상되는 순간 사제는 적당한 시기에 강론을 마치고, 대중들은 열렬히 환호하며 돌아갑니다.그때 사제는 사람을 시켜서 아직도 군중 속에 남아 서성이고 있는 그분을 몰래 데려오게 한 다음, 궁벽한 방에 가두어놓습니다.하루가 지난 다음
왜놈들이 우리나라에 쌓은 성을 ‘왜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것이 서른 개나 된다는 것을 오늘에서야 알았습니다.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왜놈들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을 점령한 상태에서 저희들의 군사적 정치적 거점을 확보하는 차원에서 성을 쌓기 시작하였는데 그 숫자가 무려 30여개로 주로 경상남도에 대부분이고, 전라도에는 한 개가 남아있다고 합니다.왜놈들은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로 시작해 조선을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고 나서 패색이 짙어지게 되는 때에 항전과 재침략의 도구로 쓸 성을 30여개 만들었는데 그 성을 만든 도구들이 거의 우리나라 읍성들의 돌과 자재를 부숴다 쌓고, 향교나 사찰의 건물을 뜯어다가 건물을 짓는 등 그 패악이 참으로 말로 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나 봅니다.결국
부처님의 전생을 이야기한 경전에는 생명의 존엄함과 평등함이 어떠한 것인지 잘 알려주는 예화가 있습니다.어느 대왕이 서원을 세우기를 “내 나라에 사는 생명은 어려움에 처해 내게 도움을 청하는 경우가 있으면 나는 조건 없이 그를 보호하리라” 다짐합니다.평소 그와 같은 마음으로 국정에 임하며 틈나는 대로 정자에 조용히 앉아 명상을 하던 왕에게 어느 날 비둘기 한마리가 급히 날아듭니다.“대왕이 평소에 세우신 서원을 잘 압니다. 저는 지금 독수리에 쫓겨 위급한 처지에 있으니 제 목숨을 어떻게든 보호해주십시오.“대왕은 목숨이 경각에 달린 비둘기를 옷 소매 속에 몰래 숨겨주려고 하는데 금방 독수리가 쫓아 날아 와서는 “대왕이여 내 먹이를 내놓으십시오. 당신의 옷소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명나라 때 지행합일을 주장한 유학자요, 정치가로 ‘왕양명’이라는 이가 있는데 이름은 수인입니다.유가에는 물론, 불교 공부에 심취한 그가 말년에 절강성 금산사라는 절을 참배할 때 100여명의 제자와 함께 합니다.왕양명은 금산사에 초행이지만,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은 모습을 보며 이상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괘념치 않고 여러 전각을 둘러보다가 한군데가 남았는데 그곳만 유독 자물쇠가 채워져 있습니다.“이 전각은 어찌 이렇게 잠가두었습니까?”물으니 안내하던 스님이 말하기를 “이 전각에는 오십 여 년 전에 우리 절에 ‘금산대사’라고 하는 훌륭한 고승이 계셨는데 한번 들어가신 뒤로 “아무도 문을 열지 말라” 하셨기에 지금껏 잠가두고 있는 상황이고, 종종 힘있는 자가 문을 열려고 했어도 도무지 열수가 없었습
‘경집’이라고 알려진 불경에는 뱀에 대한 비유의 가르침이 있습니다.(1)뱀의 독이 퍼지는 것을 약으로 다스리듯, 치미는 분노를 억누르는 수행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2)연못에서 자라는 연꽃을 물속에 들어가 꺽어버리듯, 말끔히 애욕을 끊어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3)급히 흐르는 애착의 물줄기를 남김없이 말려버린 수행자는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듯이.(16)사람을 삶에 붙들어 매는 원인이 되는, 애착을 조금도 갖지 않는 수행자는이 세상과 저 세상을 다 함께 버린다. 마치 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