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릿고개 가마솥에 밥을 지어객식구들 고픈 배 채워주고기백이 대쪽 같았던 어머니 종부의무게에 짓눌려 갈지자로 휘어진 척추 시든 풀잎처럼방바닥과 한 몸 되어누워 계신 데 깃털같이 가벼워진 몸으로어찌 붉은 동백 꽃잎 떨구시는지 황혼 녘의 구순이라 하지만 뒤돌아보며 쉬엄쉬엄부디 먼 길 서두르지 마시어요
언제부턴지 귓속 찌르레기 소리가 커졌다고어둑한 강둑에서 체머리 흔드는 갈대 무리나뚝뚝 부러지는 겨울 나목 한 그루가거기 오목가슴께에 무지근히 가로누워 있다고 인생은 끝내 맞추지 못한 큐브게임 같아돌리고 비틀어도 반듯해지지 않는 생의 귀퉁이들한때 다채롭던 꿈들을 서너 줄 이력서에 옮겨 적으며창가의 봄볕에 기대 혼곤히 낮잠에 들기도 하는 해질녘쯤 현관문 앞에 먼지 묻은 신발을 벗을 때나‘영원한 사랑’ 운운하는 휴먼 드라마를 보다가왈칵 치미는 정체 모를 서러움에 주르륵 눈물 떨구고 마는갱년기 홀로그램 속을 둥둥둥 걷고 있는 그 여자
나는 마음이 슬퍼질 때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기보다는 혼자 노래를 즐겨 듣는 편이다. 말을 많이 하고 나면 후회하는 편이라서 차라리 고독을 택한다.작년부터는 미스터 트롯 출신 가수 임영웅의 노래에 푹 빠져 있다. 그전에는 거의 트롯을 듣지 않았는데, 이상하게도 이 가수의 노래는 마음에 위로를 준다.같은 노래를 몇 번을 들어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좋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이런 현상은 나 말고도 전국의 수 많은 여성들이 그의 노래에 빠져 있는 것 같다.심지어 열성 팬들은 매일 멜론 같은 사이트에서 노래 스트리밍은 기본이고, 콘서
나는 몇 년 전 요양병원에서 일 년 넘게 조리원으로 근무했다. 덕분에 노인들의 다양한 삶을 가까이서 보게 되었고, 그 경험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그들의 삶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고자 배움 카드를 발급받아 요양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나의 첫 근무지는 내가 사는 가교리 마을, 우울증을 앓고 계신 00이 할아버지 댁이었다.당시 가교리는 장기 요양을 받는 대상자가 없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요양사의 활동이 생면부지의 일이었다.센터를 통해 00이 할아버지 댁으로 출근이 정해지면서 시어머님과 남편의 반대가 심했다.남편은 “두 분의 불
삐 그 덕마디마디 소리가 나거든 두려워 말고 뒷걸음질하지 말고 조각내지 말고 끊임없이 다독여 일어서 봐!언제 뿌려 놓은 것인지 모를 씨앗에 새싹이 돋아 꽃이 피고 열매가 맺듯굳게 조여 있던 마음 안쪽이 바깥쪽으로 기울 때 발끝에 힘주어 박차고 나가 봐!세상이 한눈에 보이거든 지난 시간은 놓아주고 불확실한 시간을 안고 뛰어 보는 거야 너무 힘이 들어 넘어지거든 그 자리에서 쉬어 봐!납작 엎드려 한숨 돌리고 헝클어진 머리카락에 빗질을 하는 거야 거울을 보고 간결해진 머릿결에 쓰담 쓰담 하는 거야, 참 잘했어!
11년 전 창원에서의 신접살림을 정리하고 뱃속 아기까지 3남매를 데리고 공주에서 과수원을 하고 계시는 어머님이 계신 시댁으로 합가를 했다. 당시 우리에게는 이게 최선이었다.이때부터 남편하고는 주말부부로 생활했다. 나는 점점 배가 불러와서 힘이 많이 부쳤지만, 나름 어머니께 보탬이 되고 싶었다.그래서 만삭의 몸으로 과수원의 일꾼들 식사와 출퇴근도 시켜주며 셋째를 낳는 전날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드렸다.주말에만 오는 남편에게 힘든 내색 한번 안 하면서 “씩씩하게 어머니와 아이들과 잘살고 있노라”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였다물론 때로는 어
외할머니 떠나신 후그리움 대신유품이라도 만져보고 싶더라번듯한 유품도 없지만남겨놓지 못해서 자책을 많이 했어 여우목도리 하나 있었는데그마저 주인 없어 그런지금방 삭아 찢어지더라그래도 깊은 내 마음에 간직해 두었으니더 깊은 곳 어디 있겠는가 나보고 남들이탐날 물건 하나 없이 살았다는데칭찬인지 흉인지는 모르겠어그 말도 맞아 변변한 것 하나 없으니너희들 빼놓고 별것 없지 그래서 엄마는삭지 않는 글을 쓰고 있단다
햇볕에 마르지 않는 습성의 배후가 바글거린다 글씨들을 펼쳐보면 축축한 것들이 많다 물먹는 하마를 곳곳에 풀어놔도 소용이 없다물소 등에 둥둥 떠 있다가 잠깐씩 바닥에 발을 붙이곤 커피를 들고얌전히 물렁한 등에 다시 오른다 아무래도 이런 날은 아작아작 팝콘을 씹으며 멜로 영화 보는 날 지켜지지 않는 약속의 빈 엽서를 받고동백나무 아래처음 꽃송이가 질 때까지 서성이던 여자 가진 것 중에 가장 환한 것을 잃어버리고어두운 문장으로 가득해지던 손수건 도착지가 다른 직행버스에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 모를 뜻밖의 사람이 바라보던 유리창어디를 가는지
우리가 어렸을 때는 동네에 아이들이 참 많았다.한 집에 7~8남매씩이었으니 많을 수밖에. 옆 동네, 뒷동네 산 너머 아이들까지 모이면 제법 시끌벅적했다.아이들은 겨울이면 모여서 쥐불놀이를 했다. 깡통에 숯을 넣어 불을 붙여 빙빙 돌려서 불이 활활 타오르면, 앞 동네로 가서 불 깡통을 돌리며 전진한다. 밀리면 지는 것이다. 그때가 아마도 정월 보름날이었던 것 같다.동네 아이들끼리 등교할 때는 밭에 있는 목화 열매와 삘기, 찔레 순을 따먹으며 논길을 걸어서 함께 등교했다. 재잘거리며 줄줄이 논길로 걸어서 가는 등굣길은 행복했다.봄에는
하루의 노동에 지친 비 오는 날집 앞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끄고 있으면차 속이 아늑하다여기서 살고 싶다살아도 될 것 같다이대로 차를 몰고 마트로 가서 먹거리를 사고서점으로 가서 시집 몇 권 사들고뒷좌석에 편안하게 발을 꼬고 누워 김밥이나 떡볶이를 먹으며청소래야 의자를 손바닥으로 털어내고발판을 툭툭 터는 일밖에 없으니시집을 읽고 밤하늘을 보는 일밖에 없을 것이다서울 집값이 올라 배 아플 일도 없겠고싫증 나면 차를 몰고 마음대로 좋은 곳 터 잡을 수 있으니세상에서 낮고도 가장 높은 집
나는 금강을 가로지르는 대전과 세종을 오고 가는 택시 운전사였다. 일선 현장에서 일반 시민들의 생생한 목소리를 듣고, 택시 근로자들이 겪고 있는 고충 사항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택시 운전대를 잡았던 것.그리기위해 정밀검사, 자격시험, 교육 등을 거쳐 택시 운전자격증을 취득해 영업용 택시근로자들의 애환을 직접 경험했다.그러면서 각종 교통표지판의 적정 설치 여부, 교통신호등 연동체계, 주ㆍ정차 금지구역 지정 적정 여부 등 교통안전 시설과 불편 사항에 대한 시민의 다양한 의견과 세종시가 추진하고 있는 주요 교육 정책에 대하여 여론을 수렴
저 멀리서 반가운 목소리가 씩씩하게 들린다. 막내아들은 나를 발견하더니 숨이 목에 차도록 빠르게 달려왔다. 그리고는 “엄마! 내가 엄마 줄 선물을 만들어 왔어요.”하며 학교 텃밭에서 재배한 각종 채소를 담은 에코 가방을 내민다.나는 가방 안의 채소를 살펴보다가 가방 겉에 새겨진 글자를 보고 그만 깜짝 놀랐다. 가방 전체가 명품인 구찌, 샤넬, 루이비통 로고로 가득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꼬맹이가 어른들이 이런 명품을 좋아할 것이라는 생각을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하니 웃음이 팡 터졌다.아들은 나에게 가방을 앞뒤로 보여줘 가며 “엄마
요즘 들어 ‘청국장’ 생각을 하면 침이 꿀꺽 넘어간다. 그리고 맛있는 밥상이 생각난다. 한때는 제일 싫어하던 음식이었는데, 지금은 아주 좋아하는 음식이 되었다.어릴 적 늦가을 추수가 끝나고 김장할 무렵이면 거르지 않고 엄마는 청국장을 해 주셨다. 그때는 청국장의 독특한 냄새 때문에 그게 그리도 싫었다.그런데 결혼하면서 바뀌었다. 시댁에 갈 때마다 시어머니께서 청국장을 해주시는데,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그때부터 내 입맛이 바뀌어 청국장을 좋아하게 되었다.공주에 내려와 시어머님께 청국장을 만드는 비법을 전수받아 이삭가 청국장을 만들어
2020년 4월 14일은 모두가 부러워하는 나의 농촌 생활이 시작된 날이다.나의 옆 지기가 건축 정보통신 감리사로 일을 시작해 2년이라는 계약 기간 동안 공주시 사곡면 화월리에 자리를 틀게 되었다.거주할 집을 구하기도 막막했는데, 세종에 사는 초등학교 친구가 도와줘 예쁜 전원주택을 임대할 수 있었다.비록 2년이라는 짧은 귀농이지만. 내게는 전원생활을 충분히 맛볼 수 있는 시간이 되리라고 기대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농촌 생활을 시작했다.우선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사기로 하고, 냉장고는 집주인 내외가 쓰다 창고 옆에 방치해 놓은
나는 1958년 5월 깊은 산속 하늘만 빤히 보이는 강원도 산골에서 보리타작해 놓은 위에서 아침에 태어났다.보리 위에서 태어나서인지 식복은 많았나 보다. 살면서 그리 배를 곯지는 않았다. 어려서 유난히 할머니를 좋아했던 나는 할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성장했다.우리 가족은 춘천에서 서울로 이사를 했고, 첫 직장을 시작한 곳도 서울이었다. 직장에서 만난 친구 따라 휴가 때 놀러 온 것이 인연이 되어 지금 나의 평생 보금자리가 되어 살고 있다.친구와 함께 처음 화월리에 오던 생각이 스쳐 간다. 어찌나 길이 험하던지 버스 뒷자리에 앉아
초등학교 4학년 때가 문득 생각난다. 아버지께서 “마늘을 캐야 하는데 일손이 없다”며 “오늘 하루 학교를 가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반박도 못하고 “네” 하고 대답하고선 말없이 호미 들고 따라 마늘밭으로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그날따라 학교 가는 친구들이 어찌나 부러웠는지…. 호미를 들고 있는 내 모습을 누가 볼까 싶어 숨고 싶을 정도로 창피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밉고, 원망스러웠다.어린 나는 왜 하필이면 아버지께서 나에게만 일하기를 요구하시는지 불만 가득한 얼굴로 분노의 호미질을 했다.아마도 아버지께선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들어서
얼마 만에 돌아온 내 집인가? 목발에 몸을 기대며 한 달 만에 들어선 내 집.아! 따듯한 이 내음. 비록 창밖 햇살을 바라보며 등을 보이고 있는 꽃들이었지만 내 화분의 여러 꽃들이 날 반기며 피어있었다.활짝 피어있는 여러 색깔의 제라늄들. 나 없이도 잘 피고 있었구나. 둘러보며 내 집이 이렇게 내게 안식을 주는 집이었던가 하고 새삼 감사와 고마움을 느꼈다.몇 년 전부터 가끔 씩 고관절에 통증을 느꼈다. 아픈 곳에 파스를 붙이거나 온탕에 몸을 담그며 몸을 달래면 또 그럭저럭 통증을 해소시키며 지낼 수 있었다.아프지 않을 때에도 “왜
꽃잎 떨어지는초사흗날눈물 흘리던 날들당신의 숨결 찾다가밤하늘 언저리에서 만난 그리움의 결정체
봄볕이 이토록 온정스러워 미치겠다고요? 목련, 청매화, 벚꽃, 명자꽃이 차례로 피고 있다고요폐부 깊숙이 이것들의 생기를 맘껏 들여마시고 싶다고요사랑에 달뜬 청춘님들 전신을 감전하는 첫 키스는 생각도 말아요어쩌나요 그것은 사탄의 유혹 먼발치서 눈으로만 아니 그마저도 실눈으로만 무조건 가까이 오지 말아요 독사보다도 치명적인 독을 옮길 수 있어요무엇보다 탐욕스런 입과 코는 고기능성 마스크로 숨 쉴 틈 없이 막아요어쩌면 이것은 신의 치밀한 벌일지도 몰라요 아마존을 불태우고 시원의 바다에 만년빙산보다 더 높은 쓰레기산을 만들고 바닷가 왜나라
쿨럭쿨럭 잦은 기침이 몸을 흔든다며칠 밤을 밝혀도 끄떡없던 단단함은 어디 가고돌고 도는 선풍기 아래늘어진 잠을 일으키는 느슨한 동작 이생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담판이라도 짓겠다고가진 건 없어도보여줄 건 울음밖에 없다고방충망을 움켜쥔 매미는 화끈한 생을 보여준다 가끔은 졸다가 잠꼬대를 흘리며 투정을 부려도기쁨의 온도가 미달이라도, 평생 같은 말만 해도 밤새도록 옆에만 있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