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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초 나는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에 있는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사립유치원에 다닌 셈인데 유치원에 다니면서 별도의 비용을 냈던 기억은 없다. 복 받은 인생이다.당시에는 왜 그리도 코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찔찔 흘린 코를 소매로 슥 닦지 말고, 손수건으로 닦으라고 손수건을 옷핀에 꽂아 매일 웃옷에 달아주는 것이 당시 어머니들의 일과였다.당시 중장유치원은 지금의 중장초등학교 아래에 있었다. 이곳에는 장난감도 많았지만, 정작 우리가 가지고 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방안에는 장난감 자동차가 있었는데 올라타고 발로 구르면 앞으로 가고, 핸들도 조작할 수 있었다. 정말 그 장난감 자동차를 타보고 싶었는데 끝내 타보지 못했다.당시의 나의 유치원 담임선생님은 대표자의 딸인 이미자 선생님이었다.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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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기자
2010.09.05 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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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가다가 만난 이용원. 중년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이발소’라는 말이 더 친숙한 곳이다. 난 허수룩해 보이는 이발소가 더욱 편하게 느껴진다.생각해 보면 옛날의 이발소엔 정겨움이 있었다. 면도날을 갈기 위한 가죽 벨트와 가죽 벨트와 함께 붙은 광목천이 있었다. 이발사 아저씨는 면도칼을 그것들을 이용해서 갈고는 했으며, 간혹 잘못하면 면도날을 갈기 위한 가죽이 면도칼에 베이기도 했다.그리고 세숫비누와 빨래비누를 반씩 쪼개 넣어 거품을 만들어 내는 도구로 쓰이는 플라스틱 통이 있었고, 이발사는 양쪽을 번갈아가며 솔질을 해서 거품을 만들어 냈다.또한 겨울이면 연탄난로를 피워 다목적으로 이용했다. 더운 물을 사용하는 것은 기본이고, 철사로 연통과 연결해 수건을 말리는데 사용했으며, 손님들이 차갑게 느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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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기자
2010.08.10 0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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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저수지. 그곳은 어릴 적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그곳에서 축구를 하다가 더우면 들어가 수영을 즐겼다.지금은 낚시꾼도 별로 없지만, 1970년대만 해도 물고기도 많았고, 낚시꾼도 많았다. 봄장마 때면 물이 저수지 부근의 논에 까지 가득 찼으며, 밤에는 잉어를 잡느라 쇠스랑이나, 포크, 톱을 든 사람들이 논을 헤매는 진풍경도 벌어졌다.이런 주민들을 놀리기라도 하듯 잉어는 주민을 피해 자기들을 잡기 위해 진치고 있는 사람을 피해 논 저쪽에서 펄쩍 뛰어 올라 밤늦도록 집에 못 가게 만들기도 했다. 그리고 어린 우리들은 횃불에 족대를 들고 붕어를 잡느라 신나게 뛰어다녔다.가뭄으로 물이 빠지면 저수지 중간정도에 있는 대추나무가 보이기도 했으며, 동네 청년들은 그곳까지 수영으로 다녀오기도 했다.나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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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기자
2010.07.30 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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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시 봉황동 제민천 옆에 있는 이 집 부근을 지날 때면 난 가슴이 따뜻해진다. 전에 이 집에 살았던 사람들을 내가 알고 있는 까닭이다.그런데 지금 그들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계속 수소문을 하고 있지만, 이민을 갔다는 소리만 들려올 뿐, 어디로 이민을 갔는지 친구들조차 알지 못하고 있다.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 그들은.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체육대회를 하는 날이었는데 강당 앞에서 신나는 음악소리가 들려와 가보니 색소폰연주자가 드럼에 맞춰 ‘서울의 찬가’를 연주하는데 무척 듣기 좋았다. 당시 문학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나는 고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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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기자
2010.07.11 2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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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는 그랬다. 기자가 어렸을 때는. 야외에서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하는 가설극장이 있었다. 기자가 살았던 곳에서는 중장리 오미방앗간 옆 공터에 천막을 치고 영화를 상영했다.장소가 결정되면 가설극장을 운영하는 팀원들은 마을 곳곳에 포스터를 붙이고, 초대권을 주고, 차를 타고 다니며 방송을 통해 가설극장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렸다.그 때 봤던 영화가운데 기억에 남는 영화는 ‘의사 안중근’ 이었는데 도로 양옆에 남자와 여자가 권총을 서로 던져가며 사격전을 벌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그리고 무협영화도 기억난다. 주인공인 여자 무사는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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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섭 기자
2010.07.05 0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