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닷없이 준비된아스팔트 위넓은 공연장 매미도 숨죽이고얄미운 고양이도먹이 찾던 비둘기도물러나 흔적이 없다 식전 행사인 듯어디선가 몰려온수천 마리 맑은 발레리나들 퇴장할 땐어미 닭 엉덩이 쫓는노랑 병아리 발걸음이다 줄줄이 사라지지만하나하나 빠짐없는1초짜리 공연들 메인 행사를 기대하며아스팔트 공연장을말끔하게 청소한다.
깊은 밤 달도 숨어 조용한데둥지는 어디 두고물속에 길고 가는 다리 잠그고 서 있는가? 병실에서 가시는 날 기다리던 어머님 모습처럼긴 목과 긴 부리는 먹이를 외면했는지앙상한 몸짓마저 까맣다 흘러가는 물소리 아직 더 들을 게 남았나멀리도 가지 않고가까이 오지도 않고 귀 기울이는가 냇바람 어둡고 으슥하여감기를 밀어내는지가늘고 긴 목만 늘였다 놓고 늘였다 놓고 세상사 다 거기서 거기라는데너만 홀로 낮도 밤도 없이울음 한번 울지 않고 날을 새는가.
엉금엉금 거북이걸음으로호박넝쿨은 자란다 언덕배기나무 등걸 위로 울바자 위로너풀너풀 속적삼으로 가린튼실한 젖통 꺼내놓는다.무수한 사랑 내어놓는다.가랑이 사이로 온갖 풀벌레들더러는 독사새끼를 키우기도 하며호박은 검붉은 얼굴로구릿빛 어깨로 익는다새마을 기와지붕 위에서도텅 빈 외양간 위에서도자식들 다 떠나고 없는이 집 늙은 부부의 금실로 익는다엉금엉금 거북이걸음으로 익는다.
수년간 백제금동대향로[아래는 줄여서 ‘백금향’이라 쓴다]에 대하여 조사하고 연구해왔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과제를 얻었다.➀ 과연 백제 사람의 순수 창작품인가?➁ 작품의 작자가 성임금[왕]인가? 창임금[왕=위덕임금]인가?➂ ‘박산로[중국]’인가? ‘수미산[인도·불교]의 향로’인가? 박산로와 향로의 중첩물인가?이 글은 처음으로 세상에 소개하는 글이므로 상세한 것은 본격적인 연구로 다룰 수밖에 없다.지금《백제금동대향로의 진실과 그 비밀》[임시 제목]으로 음악학[중앙대 명교 전인평, 지식풍속학[공주대 명교 구중회], 물리학[공주대 명교
조용히 더 조용히지구 다른 곳의 언어 나의 언어로다른 피부색다른 신념의 등불없는 자의 배고픔돌 맞은 여인맨발로 걷는 아이들리시나요 지하의 신음조용히 흐르는 눈물가슴에 흐르시나요 쉽사리 손에 안 잡혀도 오래된 약속갈망은 별 되어모퉁이 돌의 낮은 목소리우물에 물이 있니해님 뜰 때 달님 뜰 때솟아나고 있니 걸터앉은 모퉁이 돌다른 이의 언어로 이어지는아픔으로 그렁그렁한 마음이 조용히 깎아 올린새 집의 이정표.
얼굴 깊게 패인 뿌렁이 주름에바다 절벽 매달려 바람 견딜 손이 있다.구부러지다 벌써 고꾸라졌을어깨를 버리는 웃음아비의 가냘픔에여름 갈 봄 구름이 있다 구름에 아이는 자라어둠의 터널과 터널 차령 계룡산줄기로 넘고물줄기로 노래 흘려보내고무너져 내린 돌덩이에 앉아별을 보다플라타너스 되어 길을 비춘다 장대히 선 나무인가 했건만스산히 잎 떨구어등 굽혀 걸어도기막힌 구릉 둥실 떠 올린다아비로 이어가는 길휘청휘청 휘어지는 날은 가냘픈 웃음이 있다.
밖이 보이지 않는 새벽 습관처럼 집어 든 그의 시집한 가운데쯤 머물러 얼굴을 묻었다그의 생 어디쯤에서 잠시 머물러 있고 싶었다 섣부름이란 말, 무렵이라는 말 내내그 속에 잠겨 있고 싶었다 말린 표고버섯이 밀폐되지 않은 채저 아닌 다른 것으로 돌아가고있던 자리의 흔적을 지우는 것은남아 있는 것들의 몫이다 바람을 바람으로 지우고빛을 빛으로 지우는 일 사람을 사람으로 지우고눈물을 눈물로 지우는 일 오래도록 그렇게 묻혀 있고 싶었다
허기를 면하려고말라버린 찬밥이나 퉁퉁 불어터진 국수를꿀꺽 삼킨다. 몇 푼의 일당을 받으려고무시와 모멸 얼음장보다 찬 냉대를꿀꺽 삼킨다.사랑이 떠나는 아픔을꿀꺽 삼킨다. 비웃는 너털웃음과 비난을꿀꺽 삼킨다. 닥치는 대로 눈치껏 삼키는 것이사통팔달의 길 남아서 버티기 위해받아들이기 위해 모든 것을 꿀꺽꿀꺽 삼킨다.
해 걸음도 쉬어갈 무렵살이 통통한 금붕어를 닮은 어린아이들이동네 마트 목로에 앉아국물 한 방을 남김없이컵라면을 먹는다 저녁때 되었으니집에 돌아가 엄마 밥 먹으라 하니밥 배는 따로 있단다어떤 아이는 끼어들 듯 거들며과자 배도 따로 있다고 웃는다 막걸리 한 말 등에 지고는 못가도뱃속에 넣고 갈 수 있다던문득 떠오른 옛말 내 어머니도 그랬다'야, 이놈아! 술배는 따로 있는 거다' 했다 라떼는 말이야믿거나 말거나 라면도 없었고물 한 사발 들이켜 허기를 채웠었지그 시절 그런 삶도 있었지*라떼 : 나 때 또는 나의 시절을 뜻한 신조어
살아서 감사한 꿈길 깨우고창밖에 기다리고 있는 봄날눈부신 아침 햇살 느린 걸음 재촉하여이발소 가는 길 경부선 철길 아래세월이 파 놓은 굴다리를 지나갈색 풀잎만 쓰러져 있는조그만 교회 옆 오래 묵은 공터에들려오는 봄의 기도 그 길 지나온이발소 큰 거울 앞에 머쓱하게 앉아웃자란 백발의 머리카락을 자르며히죽히죽 웃는다 미련에 아쉬워도 돌아갈 수 없는지나온 길 까맣게 잊고어디서 무엇 되어 어디로 갈까약속의 봄날에 길을 묻는다
소금에 절여, 가스 불로 구운 등 푸른 한 마리,파아란 접시 위, 벌렁 누워서도 동그랗게 눈뜨고 있네고향 그리워 차마 눈감지 못하고 있네폴짝폴짝 튀어 오르는 이 집 아이들, 제비새끼처럼 쫙쫙 주둥이 잘도 벌리고 있네엄마가 떼어주는 바다 한 조각, 재잘재잘 잽싸게 받아 처먹고 있네등 푸른 바다 한 마리, 야금야금 스러지고 있네.
엄마를 보러 가는 길아버지 집을 먼저 들른다 살아서는 목소리도 크시더니기름값이라며 언제나 흰 봉투를 주시더니사업은 어떠냐, 묻고 또 물으시더니햇살만 내리쬐고 엄마는차는 안 밀리더나상석이는 장가 안 가나장가갈 생각이 없다 하면아이가이 장가 가야제 나중에 외로버오래 있다 가라 멀쩡하게 말씀하시고는돌아서면 누가 왔다 갔는지 모르시고 쓸쓸하게 저무는 햇살 받으며돌아오는 길.
묵주 하나 들고마당을 거닌다 천천히기도 속에 끼어드는 꽉 찬 잡생각 눈을 감고 하늘 숨을 깊게 마시면넓어지는 폐의 허공이 온몸을 돌아 나오는소리에 귀 기울이는.
바닷속 조개의 자궁에서 크는 보석,깨지기 쉬운 영혼, 건드리지 마라함부로 상처를 주지 마라누군들 상처가 아프지 않으랴상처 난 과일이 향기를 만들지라도……향기의 영혼은 날아가기 쉽다 사라지기 쉽다상처받은 영혼은 다 아프다당신의 영혼도 상처받은 적 있다두고두고 치료를 받아야 할 만큼 아프다출렁출렁 상처받은 당신의 영혼영혼의 상처는 언젠가 아문다아무는 만큼 반짝반짝 보석이 영근다모든 보석은 아리다 쓰리다 시리다당신의 영혼 속 뽀얗게 이는 설움이라니고개 들어 먼 하늘 바라보면진주구름 송알송알 영글고 있다.
개나리 꽃밭에서이 엄청난 개나리 꽃밭에서노랗게 샛노랗게티져 오르는 꽃망울들이사랑임을 배운다저 자유가 사랑임을퍼뜩 깨닫는다 들녘에서들녘 논두렁에서대궁 쫑긋하게 피워 올리는독새풀 밭에서지 굉장한 독새풀 씨들이사랑임을, 혁명의 한 순간임을배운다 지구를 움직이고태양을 거기 있게 하는 것도저 씨앗들 속 조그만 생명임을깨닫는다 미꾸라지송사리 떼가 헤엄치며 놀고 있는도랑 물길도 사랑임을그렇게 하나임을천지개벽으로 깨닫는다.흐드러지는 진달래꽃밭에서붉게붉게 죽었다 살아나는봄동산에서부활의, 해방의 노래를 배운다.
생활이 나무젓가락으로나를, 내 시를꼭 집어먹는다 속살 연한 광어회인 양 초장 듬뿍 찍어날름, 내 젊음을 집어먹는다나무젓가락으로 생활이여 이윽고내 생명 마구 먹어 치우는불가사리여 네 앞에서 나는한 섬, 속살 뽀얀 광어회로구나아득히 내 인생 없구나.
나는 날마다 집으로 간다우리 집은 꼭대기에 있어집으로 가는 길은힘차게 올라야 한다휘청거리면 오를 수 없다 나는 날마다 집에서 나간다집에서 세상으로 가는 길은언제나 내리막이어서나는 몸을 약간 앞으로숙이고 간다내 차도 숙인다 언덕 위 나의 집은당당하게 집으로 돌아오고겸손하게 세상에 나아가는 법을날마다 가르치지만나는 항상 거꾸로 산다.
어릴 적 가장 기다렸던 날이 설날이다. 아마도 한 달 전부터 설날을 기다렸던 것 같다. 기다리는 설날은 왜 그리 더디게 오던지….설날이 오기 직전의 장날을 ‘대목장’이라고 했는데, 이날이 기다려진 이유는 설빔 때문이었다.우리 형제들은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복주머니가 달린 한복을 얻어 입지는 못했고, 바지나 양말 정도만 받았다.당시에는 그것만 해도 감지덕지했다. 큰형님이 혼인하여 조카가 태어나 걸음마를 하게 될 즈음에 어머니가 때때옷을 해 입히셨다.6형제만 있던 집안에 예쁜 손주를 보셨으니 뭘 해서 입힌들 아까우셨을까, 색동저고리를
그 쬐그만 몸으로얼마나 동동거리며 달려왔기에종아리 시퍼런 힘줄산맥 같으신가 피 터지도록 입술 깨물고울고 또 울었다면서아직도 그 눈물샘마르지 않으셨는가 한 백 년도 못사는 가련한 인생하늘이 내려준 가냘픈 목숨하늘이 홀연히 거두어 갈 때까지이제 우리 모든 것 다 내려놓고구름처럼 살다가바람으로 훌쩍 떠나세그려 이 보게나 이 사람아!지나온 길 걸어온 길아쉬워 말고 서러워하지도 말고남은 생애 저승 땅 두려워하지 마세나고통은 고통대로아픔은 아픔대로 둘이서 나눈다면무엇이 두렵고무엇이 그리 힘이 들겠는가하늘 땅보다 소중하고 귀중한내가 있고 당신이
헤어진 지 오래도록가슴에 품은 지 오래도록이십 리 길 나부끼는 길오리라 믿는 가슴 오래도록쌀쌀히 눈발 흩어지는 대숲발그레 동글진필시 붉은 꽃서성이는 설렘대숲으로 난 하얀 발자국너에게 가리라너에게로 내가 가리라들에 나무 홀로언덕에 옛적 꽃 홀로오고 있으리라 너에게 오래도록 가고 있다